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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워주세요! 내릴게요!!!

24루블 봉고 버스 이걸 꼭 타야 할까요?

by 크바스


2759352103.jpg 학교 근처에 위치한 네바강.. 매일 봐도 아름다웠다.


기숙사에서 어학당까지는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저렴하고 편리했다. 거리는 약 5km 남짓으로, 걸어 다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버스를 탈 때마다 정류장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곤 했다. 사실 버스비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당시 요금은 16루블, 한국 돈으로 약 640원 정도. 몇 백 원만 내면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쉽게 지갑을 열 수 없었던 건, 한 달 생활비로 5,000루블(약 20만 원)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16루블은, 나에게 ‘고작’이 아니었다. 그 돈이면 학교 매점에서 맛있는 바나나 삐로쥐(Пирожки)를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간단한 점심 한 끼가 해결되는 금액이었다.


왕복으로 걸어 다니면 하루에 32루블, 대략 1,280원 정도를 아낄 수 있었다. 계산해 보니 한 달 동안 걸어 다니면 약 2만 원을 절약할 수 있는 셈이었다. 한마디로, 생활비의 10%를 걷는 걸로 버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일주일 동안 어학당까지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너무 춥고, 배도 고프고, 낯선 도시를 걷는 일은 그 자체로 피로한 일이었다. 결국 수업 시간엔 피곤해서 졸기 일쑤였다. 한 달 학비가 무려 70만 원인데… 수업에 집중하는 게 결국 돈을 버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어학당 수업은 대학교 본관과 분관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두 건물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만큼 이동도 불편했다. 대학교 본관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쪽, 네바강을 마주한 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교통편이 다양했다. 그러나 분관은 바실리섬 한가운데쯤, 지하철역에서 4~500m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문제는 그 분관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버스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택시나 민간 버스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pic-1-800x800-800x800.jpg 마르슈트까 대부분 중국(?)에서 가져온 봉고차 였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민간 버스를 타봤다. ‘마르슈트까(маршрутка)’라고 불리는 이 버스는, 정해진 노선 안에서 어디서든 탈 수 있고, 어디서든 내릴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행된다. 일반적인 공공버스와는 달리, 마르슈트까는 봉고차 형태의 작은 버스다. 운전석과 승객석 사이에는 칸막이도 없고, 승객은 차 안을 가득 채워 앉거나 서서 가기도 한다.


운전기사 대부분은 중앙아시아 출신이었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등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특유의 억양으로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마르슈트까를 몰았다.


재미있는 점은 마르슈트까 운전기사들이 마치 서커스를 하듯 운전 중에도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는 것이다. 운전하면서 손님들에게 요금을 받고, 잔돈을 세어 건네주고, 계산까지 척척 해낸다. 한 손엔 커피를 들고 있고, 때로는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운전하기도 한다.


이걸 처음 보면 당연히 “위험하지 않나?” 싶은데, 놀랍게도 사고 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마치 두세 개의 뇌를 동시에 돌리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동시에 해낸다. 심지어 러시아 사람들조차 “어떻게 저렇게 하는 거지?”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아무튼 학교 분관에 가려면 마르슈트까를 타야 했다. 문제는 요금이었다. 26루블로 공공버스보다 8루블이나 비쌌다. 물론 부담되긴 했지만, 사실 진짜 어려운 건 따로 있었다. 마르슈트까에서는 내릴 때 큰 목소리로 "○○○ 구역에서 세워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도무지 러시아어로 그 말을 꺼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러시아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말도 어눌한 내가 갑자기 큰소리로 외친다는 건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 그날도 누가 내려주길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래서 마르슈트까를 탈 때면 늘 고민했다. “오늘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말하지 못했다. 누군가 분관 근처에서 내릴 것 같으면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따라 내리곤 했다. 매번 그랬다. 그야말로 용기 없는 무임승차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요금은 냈으니 '용기 없는 유료승차'였달까.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지각을 하게 됐다. 마음이 급했던 나는 버스를 타며 다짐했다. "오늘은, 오늘만큼은 반드시 분관 앞에서 내린다!" 머릿속에선 러시아 사람들처럼 “다음 블록에서 세워주세요”라든가 “신호등 앞에서 내려주세요” 같은 멋진 문장을 떠올렸지만…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단어는 딱 하나. “여기!!!(즈데씌!!!)”였다.


혹시라도 너무 큰소리로 외쳐 주변에 민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돼, 최대한 기사 아저씨 근처 자리에 앉아 조용히 타이밍을 노렸다. 학교 분관이 가까워졌고, 버스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순간, 망설일 틈도 없이 외쳤다.


"Здесь! Здесь! Здесь!" (여기! 여기! 여기!)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무려 세 번이나 외쳤다. 버스 기사는 그제야 차를 멈추더니 나를 보며 크게 웃었다. 뭔가를 말했지만… 그 순간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마치 모든 걸 다 이해한 듯, "다, 다, 스빠씨바!" 고개까지 끄덕이며 멋지게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버스 기사뿐만 아니라 주변 승객들까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너무 우스꽝스러웠던 걸까? 아니면, 다급하게 소리친 내 모습이 귀여웠던 걸까?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엔 나도 꼭 멋지게 외쳐줄 테다. 진짜 러시아 사람처럼, 한 방에, 딱 멋지게!"


SP_GU6.jpg 대학교 본관이다. 여기서도 수업이 진행됐다. 분관 사진을 찾고 싶은데 못찾겠다..


다음 분관 수업 일정에 맞춰 나름 철저한 준비를 했다. 어학당 선생님께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특별히 발음까지 교정받으며 배웠다. 공책 한 모퉁이에 러시아어와 한글로 어떻게 읽는지 기록해 놓았다. 달달 외웠지만 뭐가 그렇게 떨렸는지 자꾸 까먹었다. 결국 손바닥에 러시아어로 적어놨다. 까먹는다 하더라도 손바닥을 보고 외치면 됐기에 그나마 부담이 덜했다.


다음 분관 수업 날. 나는 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철저히 준비했다. 어학당 선생님께 직접 찾아가 “어떻게 말해야 하나요?” 묻고, 발음 하나하나 교정까지 받으며 외웠다. 공책 한 구석엔 러시아어 문장과 그 밑에 한글 발음을 적어 두었다.


"빠잘루스타. 나 슬레두솀 아스따노브께!" (제발, 다음 정류장에서요!)


외우고 또 외웠지만 막상 생각하면 심장이 콩닥콩닥. 이상하게 자꾸 까먹는 거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수단 으로 손바닥에 러시아어로 적어놨다. 외우고 또 외우고, 잠들기 전에도 중얼중얼할 정도로 반복했다.

하지만, 막상 마르슈트까에 타기만 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떨리고, 긴장되고,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결국, 손바닥에 적었다. 혹시라도 까먹을까 봐, 혹시라도 그 순간, 입이 얼어버릴까 봐. 손바닥만 보면 됐다. 작은 글씨로 쓰여진 그 문장이 그날 나의 전부였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는 결연한 각오로 마르슈트까를 잡아탔다.


"이번엔… 이번엔 꼭 말한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출발했고, 나는 기사 가까운 자리에 조용히 앉아 손바닥에 적어 놓은 문장을 몰래 확인했다.


"빠잘루스타. 나 슬레두솀 아스따노브께!"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요동쳤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드디어… 지금이야…! 입을 열려는 그 순간,


“…” 말문이 막혔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 가슴은 두근두근, 목은 타들어가고, 그간의 연습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목적지를 그대로 지나쳤다. "아앗!" 당황한 나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외쳤다.


“즈데씌!!! 즈데씌!!! 즈데에에에에에에씌!!!”


버스가 급히 멈춰 섰고 기사는 다시 한번 피식 웃었고, 주변 사람들까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또 한 번 손바닥을 꾹 쥔 채, 얼굴이 빨개져 버스에서 내렸다.


나도 러시아 사람들처럼 멋지게, 당당하게 "다음 신호등에서 세워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실패했다. 말문이 막혔고, 용기는 허공에 흩어졌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고, 너무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무사히 수업에는 도착했지만, 얼굴은 계속 화끈거렸다.

‘이번에도 안 됐구나…’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러시아어도 하나도 모르고, 러시아에 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니야?’ 그렇게 또 한 번, 조용히 나를 다독였다. 다음번엔 꼭, 꼭 성공하리라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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