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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속이 얼면 영하 15도입니다.

콧속에 온도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by 크바스


그래도 나름 아름다웠던 겨울의 뻬쩨르

콧속이 어는 온도

2008년 12월, 러시아 뻬쩨르부르크의 겨울을 처음 보냈다. 유학 오기 전까지 러시아의 추위는 북극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라 쉽게 믿기진 않았지만, 무의식중에 내 머릿속엔 러시아가 마치 겨울왕국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매일같이 내리는 눈과, 나뭇가지에 얼어붙어 눈꽃처럼 피어난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겨울이었다. ‘러시아는 겨울이 잘 어울리는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렇게 춥지 않았다. 나름 버틸 만했다. 12월 평균 기온은 대략 영하 4도에서 8도 정도였는데, 한국에서 한파가 올 때 느끼는 추위와 비슷한 정도였다.


하지만 가끔, 정말 극단적으로 온도가 떨어질 때가 있었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면 영하 25도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 정도가 되니, 말 그대로 모든 게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온 세상이 얼어붙는 것 같았고, 입과 눈까지 전부 어는 기분이었다. 입김은 내 얼굴을 하얗게 만들었고, 눈썹, 앞머리, 수염까지 얼음이 송골송골 맺혔다. 추운 날씨는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쉽게 적응되지 않는 게 있었다. 바로, 날씨가 주는 우울감이었다. 뻬쩨르의 겨울은 어둠 그 자체다.


해가 하루 종일 뜨지 않는 날도 있었고, 떠도 오전 10시쯤 살짝 모습을 비췄다가 오후 3시면 금세 사라다. 하늘은 거의 매일 회색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둠과 회색빛 속에서 지내다 보면, 괜히 마음까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해가 뜨는 날이면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일부러 햇빛을 받으며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 햇살이 참 따뜻했다. 정말, 햇빛이 그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뻬쩨르의 밤거리


생각했던 것보다 추위는 매서웠다. 한국에서 겪던 추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바다와 강이 근처에 있다 보니 습도가 높인 것 때문인지 바람이 매서웠다. 이런 강추위 속에 콧속이 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어느 날 영하 15도 정도 되는 날씨에 거리를 걷는데 숨을 쉴 때마다 콧속이 얼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추위는 훨씬 매서웠다. 한국에서 겪던 추위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바다와 강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습도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이 유독 매서웠다. 그렇게 칼바람 부는 날씨 속에서, 콧속이 어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어느 날, 영하 15도쯤 되는 날씨에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숨을 쉴 때마다 콧속 안쪽이 하나씩 얼어붙기 시작했다. 정말,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콧속이 얼고, 내쉬면 다시 녹는 일이 반복됐다. 콧물은 계속 흘렀고, 흘러나온 콧물은 금세 얼어붙었다. 그래서 손수건을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바로 닦아줘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영하 13도쯤 되는 날씨에 콧속이 얼지 않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계속 얼어붙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멀쩡했다. 별일 아닌 것 같았지만, 그게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된 것처럼 괜히 신이 났다.


기숙사 창문에 붙어 있는 수은 온도계를 황급히 확인했다. 역시나, 정확히 영하 13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며칠 뒤, 다시 기온이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간 날, 밖에 나가 숨을 들이쉬자마자 콧속이 또 얼기 시작했다. 겨우 1~2도 차이인데 얼고 안 얼고가 갈리는 게, 정말이지 신기했다.


그렇게 날마다, 오늘은 몇 도일 때 콧속이 얼어붙는지를 체크했다. 영하 10도부터 시작해서 하나하나 확인해가며, 콧속이 얼었는지, 안 얼었는지를 기록했다. 그리고 곧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콧속은 정확했다. 영하 15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김없이 '따드득' 하고 얼어붙었다. 그 덕분에 나는 콧속만으로도 대략적인 기온을 알아챌 수 있게 됐다. “이 정도면, 꽤 놀라운 발견 아닐까?” 싶어서 스스로 감탄하기도 했다.


러시아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다. 그들도 콧속이 얼어붙는 경험은 종종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몇 도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생각했다. 러시아에 살면서, 내 몸에 이렇게 정밀한 온도계가 있다는 게 은근히 쓸모 있구나.




매일 타기도 했고 좋아했던 7번 버스


모르는 러시아 할머니가 때린 등짝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두 번이나 맞아본 적이 있다. 나로선 꽤 생소한 경험이었다. 한 번은 제대로 된 등짝 스매시, 또 한 번은 어깨를 툭 치는 정도의 약한 펀치였다. 그런데 두 번 다 이유는 같았고, 날 때린 이들도 같은 연령대였다. 러시아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들의 분노는 단순했다. 한겨울에 모자와 목도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러시아 겨울에 그건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살던 버릇대로, 추워도 모자나 목도리 없이 다녔고, 잠바 지퍼는 늘 열려 있었으며, 속내의를 입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생활 습관을 러시아까지 가져온 것이 문제였다. 결국 할머니들 눈에는 “이놈, 얼어 죽고 싶나” 같은 표정이 비쳤고, 그렇게 나는 등짝과 어깨를 얻어맞았다.


할머니는 연신 말씀하셨다. “머리는 중요한 거야! 모자는 꼭 써야 해!” 감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그분들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맞긴 했지만, 기분 나쁜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챙겨준다는 마음에 고맙기까지 했다. 게다가 러시아에 온 지 3개월 만에 할머니의 러시아어가 귀에 들어온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그 말들이 들려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할머니 입장에서도 모르는 동양인 등짝을 때리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신이 들었다. 그 폭력은 정당했다.


할머니에게 처음 맞았던 7번 버스 안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날은 유독 추운 날이었다. 어학당으로 가는 길, 버스를 탔고 몇 정거장 지나 자리에 앉았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러시아어 공부를 위해 라디오를 켰다. 너무 추웠던 터라 두툼한 노스페이스 패딩에 속옷까지 껴입고 완전무장했었다. 재미있던 건 너무 추운 날씨 탓인지 버스 안 유리창이며 벽면까지 얼음이 얼어붙어 있었다는 점이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얼음이 살짝 맺혀 있었고, 그럼에도 버스 안은 이상할 만큼 포근하게 느껴졌다.


버스 의자 아래에서는 전기 모터 같은 히터에서 뜨거운 열기가 나왔다. 조금 지나니 오히려 더울 정도였다. 나는 창밖을 보며 여유롭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내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너무 놀라 재빨리 돌아봤다. 뒤에 서 있던 건, 전혀 모르는 70대쯤 되어 보이는 러시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다짜고짜 “감기에 걸리고 싶어!? 모자랑 목도리는 어디 있냐고!?” 라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셨다. 버스 안의 이목이 순식간에 나에게 쏠렸다. 당황한 나는 얼떨결에, 더듬더듬 러시아어로 “목도리랑 장갑은... 집에 있어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설픈 러시아어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할머니는 특히 “모자는 꼭 써야 해!”라며 추위에 대한 긴 설교를 시작하셨다. 결국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5정거장 동안 할머니의 겨울 특강을 들어야 했다. 등짝은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두꺼운 패딩을 내리칠 때 났던 ‘퍽’ 하는 소리는 진짜 너무 놀랄 정도로 컸다. 그때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지 겨우 세 달 정도였을 뿐이다.


러시아에 오기 전에 여러 커뮤니티에서 ‘러시아 스킨헤드’ 이야기를 수없이 봤던 터라, 잠깐이나마 ‘혹시... 무서운 스킨헤드가 나를 때린 건 아닐까?’ 하고 기겁했었다. 다행히도, 날 때린 건 약하디 약한 러시아 할머니의 손바닥이었지만 말이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무서웠던 기억으로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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