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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는 버스 차장 자리야!!

전 모르고 앉았어요..

by 크바스
러시 아버스차장.jpg 러시아 버스나 전차 대중교통에 항상 타고 있는 버스차장

당시 러시아의 공공 버스에서는 요금 징수 방식이 꽤 특이했다. 바로 깐둑따르 (кондуктор), 즉 버스차장에게 직접 요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 한 대마다 한 명씩 배정된 이 버스차장은 요금 징수뿐 아니라, 버스 안의 전반적인 질서까지 관리했다.


버스를 타보면, 버스차장은 마치 작은 왕처럼 군림한다. 보통 버스 중간쯤에 버스차장을 위한 전용 좌석이 있는데, 그 자리는 꼭 ‘왕좌’처럼 꾸며져 있다. 좌석 하나가 버스차장의 특별한 공간으로 지정되어 있고, 거기엔 방석이 깔려 있거나 심지어 거룩한 분위기의 이꼰화(성화)가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 자리는 감히 누구도 앉을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버스차장의 자리는 늘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차장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요금을 걷느라, 정작 자신의 ‘왕좌’에는 거의 앉지 못하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말린 버스표. 버스요금을 내면 영수증처럼 끊어준다.
b8cc2b6df1f1b2599a1cca7fcab3117f.jpg 행운의 버스표를 찾아라!

버스 요금을 내면 손가락만 한 크기의 종이표를 하나 받는다. 이 버스표에는 6자리 숫자가 찍혀 있는데, 앞의 세 자리 숫자와 뒤의 세 자리를 각각 더했을 때 그 합이 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표를 받으면 “행운의 표”라며 즐거워했고, 이 때문에 버스차장을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때로는 아예 ‘행운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버스차장을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구석도 있었다.


버스차장 대부분은 40~50대의 러시아 아주머니들이었다. 눈에 띄는 공통점이라면, 대부분 체격이 크고 인상이 강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 탓인지, 말투나 행동도 거칠고 억센 경우가 많았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마치 러시아의 불곰 같은 느낌이었다. 버스가 만석일 때면 주저 없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사람들을 밀치며 다녔고, 말투는 늘 신경질적이고 급해 보였다.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고,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버스차장에게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정류장은 OOO입니다.”

“요금은 미리 준비하세요. 잔돈 없습니다. 알아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잔돈! 잔돈은 미리미리 준비하세요! 안 그러면 타지 마세요!”


가끔 큰 단위 지폐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버스차장은 쏘아붙이듯 말한다.
“여긴 은행이 아니야!”


러시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아침 수업 시간은 모두 비슷해서, 기숙사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버스는 늘 만석이었다. 출근 시간도 겹치다 보니, 많은 사람들로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간신히 안전봉을 붙잡고 서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앉지 않는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 자리를 쳐다보지도, 앉지도 않는 모습이 이상하긴 했지만, 버스에 치여 정신이 없는 나로서는 그 빈자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곧바로 자리에 앉았고,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두세 정거장쯤 지나자, 빨간 조끼를 입은 아주머니가 다가와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Это место кондуктора!!!!!!!”
(여긴 버스차장의 자리야!!!!!!!!!)


scale_1200.jpeg "버스차장의 자리, 앉지 마세요!"라고 붙여져 있다


러시아어를 거의 몰랐던 나는, 그 아주머니가 왜 소리를 지르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место кондуктора”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러시아어를 어느 정도 배우고 나서야, 그 아주머니가 내게 뭐라고 소리쳤는지, 그리고 그 스티커에 적힌 문구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주머니의 고함소리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네, 네네네, 네, 고맙습니다!"(“다, 다다다, 다, 스파씨바…”)하고는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러시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내가 아는 러시아어라고는 "네"와 "고맙습니다"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당황스러운 순간에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는, 그 두 개밖에 없었다.


버스차장 아주머니는 여전히 화가 많이 난 듯, 계속 뭐라뭐라 소리치며 나를 향해 호통을 쳤다. 나는 창피함과 민망함에,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음 정류장에서 그대로 내렸다. 아직 몇 정거장을 더 가야 했지만, 그 버스에 더는 머물 수가 없었다. 불편하고 뜨거운 시선 속에서 버티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 이후로 무섭기만 한 버스차장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상냥하게 인사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고, 내가 러시아어로 인사라도 하면 "외국인이 러시아어 잘하네!"라며 칭찬해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남자 버스차장부터 젊은 아가씨 차장까지,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날 버스차장 자리에 앉았던 건 순전히 실수였다. 러시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탓이다.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당연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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