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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영화배우로 데뷔하기 - 1

나도 연기 할 수 있습니다!!

by 크바스

연극 연출과에 입학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학교생활도 익숙해졌고 나름대로 연출에 대한 자부심도 쌓여갔다. 하지만 연기적 재능은 아주 부족했던 터라 늘 나의 연기에는 불만이 많았다. 러시아에서 연출을 공부한다면 연기 공부는 필수로 해야 한다. 러시아에서는 연출가가 배우보다 연기를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배우에게 연기 지시를 해야 하는 연출가가 정작 연기를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말이 안 된다고들 한다.


덕분에 연출 전공 학생들은 배우 학사 과정의 커리큘럼까지 함께 수료하게 된다. 다만 정규 과정인 연출 커리큘럼을 함께하다 보니 수업이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여기에 배우과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정규 공연에 참여해 2년 이상의 배우 활동을 증명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국가시험까지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까다로운 과정 때문에 졸업장을 받는 학생 수는 한 반에서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수업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잠깐의 틈만 나면 연기 연습과 작품 준비에 매달리는 생활이 3년째 계속됐다. 끝없는 수업 속에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고, 머리는 터질 듯했다. 연기적 재능은 부족했지만, 누구보다 잘하고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기존 연기 이론부터 새롭게 주목받는 현대 연기 이론까지 완벽히 익히고 싶었다. 해외에서 유명한 오픈 클래스가 열리면 어디든 찾아가 수업을 들을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t0mgEKDD_BI.jpg 학생시절 공연 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무도회 초청명단 한 장면


그러던 중, 학교에서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러시아 영화에 동양인 배우로 출연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그 영화는 <하얼빈>이라는 작품으로, 러시아의 유명 영화 제작사가 촬영 중이었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러시아와 중국을 배경으로 하며, 제작진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 역할을 맡을 동양인 배우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는 나뿐만 아니라 배우로 유학 온 형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 외에도 중국, 일본, 몽골 우수 장학생들까지, 합하면 20명 가까운 동양인 출신 배우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지도 교수님 아래에서 배우며, 프로 못지않은 연기 실력을 갖춘 학생들이었다.


연출과 출신인 내가 배우과 학생들의 비주얼과 연기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그들과 비교하면 끝이 없었고, 자존감만 떨어졌다." 타고난 재능을 뛰어넘으려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잘돼서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프로 배우 타이틀을 얻는 건 아닐까? 빅토르 초이처럼, 설마 나에게도 그런 일이?’ 같은 쓸데없는 상상까지 했다. 이 영화 출연 기회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디션 대본을 받자마자 곧바로 외우기 시작했다. 앞뒤 맥락을 추론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맞춰 연기를 만들어 나갔다. 대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A4 용지 5줄 정도의 독백이었는데, 중국인이 받는 탄압과 억울한 상황을 대변하는 내용이었다. 쟁쟁한 배우과 친구들보다 내 연기와 비주얼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만의 개성 있는 연기 색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했다.


먼저, 대사를 입이 닳도록 반복했다. 학교 가는 길, 밥 먹는 시간, 화장실에 갈 때까지 쉬지 않고 되뇌었다. 잘 때도 5줄의 독백을 계속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학교에서 준비하던 작품들까지 잠시 미뤄두고, 오로지 맡은 배역의 대사에 집중했다.


독백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와 자유 연기도 함께 준비했다. 노래는 동양적인 음색이 돋보이는 한국 CCM 찬양, ‘사명’을 골랐다. 동양적인 색채가 강한 찬양이라,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와 잘 맞을 것 같았다. 어차피 가사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그보다는 감정 전달이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유연기로는 알렉산드르 밤필로프의 <작년 여름 출림스크에서> (Прошлым летом в Чулимске)에서 노인 일리야 배역을 준비했다. 러시아 희곡 중 유일하게 동양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라, 나는 반드시 이 역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70대 노인 역할이라, 어눌한 러시아어를 구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동양인을 배경으로 한 주인공이 러시아 희곡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천재 극작가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이기에, 인지도도 매우 높다.


드디어 오디션 당일, 도시 중심가에 있는 영화 제작사를 방문했다. 로비에 도착해 안내 직원의 도움을 받아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때마침 같은 학교 배우인 친한 형도 오디션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나오는 형을 보자, 나는 기가 죽었다. 친한 형은 오디션을 잘 봤다고 이야기하며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drYemkBPBiE.jpg 학생시절 공연했던 <로미오와 줄리엣> 무도회장 한 장면


곧이어 내 차례가 되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3대의 카메라가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 중이었고, 밝은 흰색 조명 2개가 맞은편에 켜져 있었다. 심사위원은 총 3명이었고, 긴 책상에 앉아 종이를 펼치며 기다리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라고 요청하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그들은 바로 준비한 연기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마음을 다잡고 준비한 대사를 외쳤다. 발음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게 볼펜과 코르크 마개를 물고 열심히 연습했다. 드디어 결과를 보여줄 때가 왔다. 억양이 외국인 느낌이 나지 않도록 반복 연습한 대사와 연기를 하나씩 해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기가 끝났다. 연기를 하면서 내가 연기 중인지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집중했다. 대사를 틀리거나 까먹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은 준비한 노래와 자유연기는 따로 요청하지 않았다. 오디션은 독백 하나로 끝났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지만, 심사위원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후회는 없었다. 오랜만에 연기에 심취해 맡은 배역이었다. 물론 내 연기엔 아쉬운 부분이 많았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졌을 것이다. 과연 나는 합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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