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출연한것 치고 출연료가 짭짤하네요?
이틀 후, 영화 제작사에서 전화가 왔다. 배역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은데 내가 된 것에 스스로 놀랐다. 솔직히, 배역이 내 이미지에 더 어울려서 된 것 같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영화 담당자는 촬영 일정을 서둘러 잡고 싶다고 했다. 무엇보다 출연료가 가장 궁금했다. 배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여유로운 유학 생활을 꿈꾸던 나에게 출연료만큼 궁금한 것은 없었다. 전화기를 붙든 채, 언제 출연료에 대해 물어볼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먼저 촬영 날짜, 집합 장소, 이동 방법, 그리고 복장과 머리 스타일까지 충분히 이야기 나눈 뒤, 통화가 끝나갈 무렵 재빨리 물었다.
"혹시 영화 출연료는 얼마나 되나요?"
"만 루블 지급될 예정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와... 대박!!!)
만 루블이면 내 한 달 생활비였다. 촬영이 고작 하루 만에 끝나는데 출연료가 10,000루블이라니? 이건 대박이었다. 한국에서도 여러 촬영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인지도가 없으면 하루 종일 촬영해도 많이 받아야 10만 원이었다.
드디어 영화 촬영 날이 되었다. 아침 7시까지 지정된 지하철역 앞에 모여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영화 촬영은 근교에 있는 기차역에서 진행됐다. 그곳에는 중국식 건물들이 여러 채 세워져 있었다. 하얼빈을 배경으로 만든 세트장이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나는 여기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중국인 역할을 맡았다.
세트장에 도착하자, 스카프를 두른 감독이 다가와 내게 대본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여기에 적힌 대사를 잘 숙지해서 연기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촬영 전, 감독은 이번 장면과 내 배역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감독은 대사의 일부를 계속 바꾸는 것이 아닌가? 대본 그대로가 아니라 일부를 변형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대사는 세 줄로 줄었다. 짧은 대사였지만 실수하지 않으려 촬영 세트장 구석으로 가서 다시 외우기 시작했다.
촬영 직전, 감독이 다시 나를 불렀다. 그는 대사를 한마디로 줄이고 싶다고 말했다.
"저 나쁜 놈들이 그런 거라구요!"(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뉘앙스였다.)
간단한 촬영치고는 규모가 꽤 컸다. 40~50명의 스태프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현지 중국인도 20명가량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전혀 하지 못해 인솔자가 한 명씩 붙어 있었다. 주연으로 보이는 러시아 배우들도 촬영장을 오가며 준비하고 있었다. 촬영장으로 쓰인 기차역은 겉보기에는 실제 같았지만, 내부와 뒷면을 살펴보니 마감이 허술했다.
드디어 촬영 시작! 촬영장은 희뿌연 연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마치 이른 아침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고, 불이라도 난 것 같은 분위기였다. 큰 사건이 터진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20명 가까이 되는 중국인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연기를 시작했다. 앞뒤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니 답답했지만, 비장한 표정으로 나는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그리고 당당하게 눈물을 머금고 외쳤다.
"저 나쁜 놈들이 그런 거라고요!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요!"
헉, 긴장한 나머지 감독이 마지막에 빼달라고 했던 대사를 무심코 덧붙여 연기하고 말았다. 그러자 감독은 "스톱, 스톱!"이라고 외치며 바로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조용히 부탁했다.
"그 뒤에 대사는 꼭 빼고 다시 한 번 부탁해요."
감독은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최대한 누르며 굉장히 공손하게 다시 한 번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촬영 세트 한가운데에 섰다.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 나쁜 놈들이 그런거라구요!"
"Хорошо! Хорошо!"(좋아!)
감독은 바로 오케이를 하고 내 연기 장면은 마무리됐다. 생각보다 허무했다. 겨우 한 문장 이야기하려고 여기 온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더 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충분히 더 할 수 있었는데,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이것뿐이다. 어쨌거나 마무리를 잘하고 의상을 갈아입었다. 대기시간만 거의 3시간이었고 촬영한 시간은 고작 10분 정도밖에 뒤지지 않았다. 같은 장면을 여러 각도의 카메라로 촬영했는데 겨우 대사가 한마디였다 보니 10분 정도 걸렸다.
그리고 어느 관리자가 나를 불렀다. 출연료 정산을 위해 부른 것이다. 출연료는 당일 현금으로 지급된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기를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 자동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았다. 주섬주섬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꽤 간단한 계약서 양식이었다. 출연계약서였지만 솔직히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혼자 이해하는 척하며 '오케이, 오케이, 좋아'라고 입으로 주절거렸다. 그런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출연료 부분이다. 이야기한 대로 만 루블을 지급한다고 쓰여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인했다. 그러자 그는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냈다. 천 루블짜리 수백 장이 뭉쳐져 있었다.
그는 천 루블짜리 10장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잠깐 촬영한 것에 비해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돈을 받으니 의욕이 샘솟았다. 아쉬운 마음에 매니저에게 혹시 다음 촬영이 있냐고 물어봤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 촬영이 마지막이라며, 더 이상 동양인이 등장하는 장면은 없다고 했다. 촬영을 위해 무엇이든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단 한 마디 대사로 끝나다니 너무 아쉬웠다. 나의 러시아 영화배우 데뷔는 결국 한 마디 대사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