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손발이 떨린다.
러시아 유학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가 ‘스킨헤드’였다. 당시 국내 뉴스에서는 러시아에서 한국인이 스킨헤드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보도가 종종 나왔다. 러시아로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나에게는 꽤나 두려운 소식이었다.
먼저 뉴스와 인터넷에서 스킨헤드의 외형적 특징을 찾아보았다. 삭발한 머리, 가죽재킷, 그리고 나치를 찬양하는 문신이 대표적인 특징으로 언급되었다. 특히 삭발은 가장 눈에 띄는 요소였다. 왜 삭발을 고집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러시아에서 만약 삭발한 사람이나 대머리를 본다면 일단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2~3명씩 무리를 지어 다니며 폭력을 휘두를 대상을 찾는다고 했다. 내가 갈 예정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에서 스킨헤드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라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흘렀다. 아직까지 스킨헤드를 보거나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긴장하는 습관이 들어, 마치 미어캣처럼 주위를 살피곤 했다. 혼자 거리를 걸을 때면 신경이 곤두섰다. 종종 집시나 소매치기를 마주하긴 했지만, 큰 위협 없이 막을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이 감돌면 재빨리 자리를 피했고, 누군가 지인의 가방을 건드리거나 폭력을 행사할 기미가 보이면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멈춰!"라고 외쳤다. 나름대로 주변을 잘 살피며 경계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스킨헤드를 처음 본 날은 유독 평온한 주일 오후였다. 거리는 한산했고, 분위기는 여유로웠다. 교회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딸린스까야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웅장한 역사의 복도를 걸으며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다. 한적한 지하철역은 조용했고, 사람도 몇 명 없었다. 나는 환승 출입구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사 중간까지 걸어갔다.
잠시 후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왔고, 문이 열렸다. 나는 서둘러 열차에 올라 가장 끝자리, 좋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러시아 청년 다섯 명 정도가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주위를 빠르게 살피더니,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보이는 두 청년에게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졌다.
맞고 있던 두 청년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심지어 비명조차 내지 못했다. 지하철 칸에는 나와 가해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지만, 러시아 지하철은 칸별 이동이 불가능했기에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 문이 열리고 닫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20초 남짓.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집단 구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혹시 그들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나까지 폭행당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혹시 칼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공포는 더욱 커졌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마치 내 눈도 얼어붙은 듯, 맞고 있는 중앙아시아 청년들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마음 한편에서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두려움에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킨헤드들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아드레날린에 눈이 멀어버린 걸까? 아니면 정말 나를 보지 못한 걸까?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겨우 2미터 남짓,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데도 나를 그냥 지나친다는 게 가능할까?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한 걸까?
그들의 무자비한 폭행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시간이 멈춘 듯 길게 느껴졌다. 몇 초쯤 지났을까. 지하철 문이 닫힐 시간이 되자, 스킨헤드들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서둘러 열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걸음으로 지하철 입구 방향으로 사라졌다.
지하철이 출발하자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손발은 떨렸다. 스킨헤드들과 멀어졌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보이는 두 청년의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그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음 정류장에서 황급히 열차에서 내렸다. 나는 순간 떠올렸다. 내가 아무리 주위를 경계한다고 해도, 이런 예측 불가능한 폭력 앞에서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들 중 누구도 머리를 밀거나 가죽 재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20대 초반의 청년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나는 항상 주위를 살피며 조심했지만, 폭력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과 장소에서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타지에서의 안전이란 무엇인지 다시 깊이 고민하게 됐다.
그날의 사건은 내 마음 깊숙이 두려움을 심었다. 처음으로 러시아 생활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고 위험할 수도 있는지 실감했다.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왜 나는 무사했을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인간은 때로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