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책 현역 맞아요?
연극 전공의 특성상, 고전과 세계 문학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했다. 그중에서도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부분을 발췌해 작품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이는 마치 바다에서 진주를 찾는 일처럼 쉽지 않았다. 매주 한 편씩 연극으로 제작해 심사를 통과해야 했기에, 적절한 작품을 찾는 일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대사가 충분하면서도 극적인 장면이 포함되어야 했고, 부분 발췌이더라도 작품의 핵심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어야 했다.
20세기 러시아 작품을 읽으려면 헌책방이나 학교 도서관을 찾아야 했다. 러시아의 여러 도서관과 헌책방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오래된 종이와 나무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묵직한 향이었다. 무겁지만 싫지 않은, 오히려 정겨운 냄새였다. 특히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는 이 향기가 더욱 짙게 풍겼다. 개교한 지 4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학교인 만큼, 도서관 또한 오랜 세월을 지나며 깊은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300년 넘은 석조와 목조 건물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 속에서 퍼지는 책 냄새는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 작은 도서관에 보관된 책들은 정말 오래됐다. 100년이 넘은 책도 적지 않았다. 숫자로는 쉽게 와닿지 않지만, 실제로 100년 된 책을 손에 쥐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지만 인쇄된 글자는 여전히 또렷했고, 종이에서는 짙고도 깊은 냄새가 났다. 대부분 낡았지만 여전히 충분히 읽을 만했고, 오히려 세월이 더해진 감성 덕분에 더욱 손이 가는 책들이었다. 나는 학교의 오래된 책들을 넘기며, 연극사에 한 획을 그었던 선배들의 손길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기대하곤 했다.
100년 가까이 된 책을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안톤 체홉, 막심 고리끼, 오스트롭스키 등 1900년대 초반 작가들의 작품을 빌릴 때면, 가끔씩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책을 손에 쥘 기회가 있었다. 어떤 책들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여기저기 테이프가 덧대어져 있기도 했다. 오래된 책을 읽는 일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과거의 힘에 이끌려 예술 정신에 더 충실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럴 때면 공책을 펼쳐 놓고 희곡을 분석한 내용과 감상평을 적어 두었다.
50~60년 된 책들도 상당히 많았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문학과 소련 시대 문학을 뒤적이며 틈날 때마다 작품을 찾아 읽었다. 역시나 아직 국내에 번역된 도서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원문을 직접 확인하며 읽어나갔다. 사전을 펴고 읽는 맛도 꽤 괜찮았다. 모르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문장에서 단어가 의미하는 내용을 정확히 찾아내어 맞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재미있는 작품을 만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읽었다.
빌려온 책의 반납 기한은 보통 2주였다. 2주내 반납하지 않으면 앞으로 책을 대여하는데 제한이 생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한을 꼭 지켜야 한다. 2주 동안 동거동락 했던 책을 돌려주기가 아쉬울때가 있었다. 그럴때면 헌책방에 들러 가능한 비슷한 책을 찾아 구매하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책의 정취를 느끼며 읽었던 여운과 감정을 간직하고 싶었다. 밤늦게 받았던 영감은 찰나처럼 지나갔지만, 책을 다시 펼치는 순간 그 순간들이 조각 조각 되살아났다. 혹시 학교 도서관에서도 이런 경험을 의도하고 오래된 책을 빌려주었던건 아니었을까?
소련 시대 문학은 풍자적인 작품이 많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특히 공산주의 문화와 생활 환경과 같은 부분은 익숙하지 않아 완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발췌하여 작품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수님의 추천으로 소련 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바실리 슉신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소련 정부와 당시 시대 상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공산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유머러스한 비유가 돋보였다. 때로는 가벼운 유머를 넘어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그의 작품에 감탄하기도 했다. 다만, 러시아 원문으로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 완벽히 이해하고 싶은 작품들은 따로 체크해 두었다. 이후 러시아어 선생님께 가져가 소련 시대의 배경과 작품 속 의미를 하나씩 배워 나갔다.
나는 슉신의 단편들을 중심으로 무대에 작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소련 시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소련 문학을 무대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그 당시의 정서를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다. 내가 살던 한국의 정서와 문화는 소련 시대와는 너무나도 달랐지만, 바실리 슉신의 언어는 한국인인 나조차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탁월했다.
슉신 덕분에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외국인으로서 어떤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유머'라는 키워드 하나로 슉신의 작품을 해석하고 완성할 수 있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봐도 러시아다운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 억지스러운 동양적인 해석이나 한국적인 정서에 머물지 않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작품을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같은 반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련 시대를 직접 경험한 친구들의 조언 덕분에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디테일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다행히 교수님께서 내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재밌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머가 담긴 장면을 운 좋게 발췌해 무대에 옮긴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다. 이는 러시아 특유의 유머가 아니라, 누구나 공감하고 웃을 수 있는 '유머'의 힘 덕분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오래된 책들과의 인연 덕분에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