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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아가씨들에게 둘러쌓였다.

"전 춤 잘 못춘단 말이에요.."

by 크바스

러시아어 공부에 불타올라 매일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잠들었다. 기본 문법, 회화, 듣기 등으로 나누어 하루하루 계획적으로 공부해 나갔다. 연말과 공휴일에도 예외는 없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기숙사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공부하며 점점 늘어가는 러시아어 실력에 뿌듯함을 느꼈다.


공부하면서 가장 좋아하게 된 시간은 새벽이었다. 밤 12시가 넘으면 룸메이트도 잠들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라디오를 틀어 단어를 익히는 재미가 있었다.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익숙한 단어가 들릴 때마다 메모하고 뜻을 찾아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sklonsyw.jpg 러시아 문법 '격'에 대한 설명표


러시아에 온 지 벌써 3개월, 어느덧 2009년 새해를 앞두고 있었다. 설렘 가득한 12월 31일이었지만, 나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오늘의 공부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숙사엔 축제 분위기가 가득했다. 방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넘쳐났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숙사는 축제의 장이었다. 아직 저녁 6시도 안되었지만 방마다 함성이 터져나왔고 다양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뭔가 쓸쓸한 마음에 맥주 한병을 사와 저녁과 먹으며 올 한해를 돌아보기도 했다.


즐거운 기분을 내고자 라디오를 틀어 러시아 가요 채널을 찾아봤지만, 쿵짝거리는 음악은 금세 끄고 말았다. 하루쯤은 마음 편히 놀아도 될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사실 교회의 러시아 청년들과 함께 새해를 맞으며 밤새 어울릴 기회도 있었다. 맛있는 러시아 음식을 배터지게 먹고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가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문제는 500루블의 회비였다. 한 달 생활비 5,000루블로 버텨야 했던 나에겐 너무 큰 금액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어진 숙제와 공부에 집중했다. 밤 12시가 되어도 기숙사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방마다 함성과 음악이 울려 퍼지며 새해를 맞이하는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위층에서 굉장한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쿠쿠쿠쿵!! 쾅! 쾅!"


엇갈린 박자로 쿵쿵, 쾅쾅 울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마치 망치로 방바닥을 내려치는 듯한 소음이었다. 심지어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중국인 룸메이트마저 시끄럽다며 깨어날 정도였다. 그래도 새해를 맞이한 특별한 날이니, 스스로에게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라고 말하며 넘기려 했다.


하지만 소음은 1시간 넘게 계속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층간 소음에 결국 윗층으로 올라가서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조용히 해달라'는 러시아어를 사전에서 찾아 문장을 완성한 후, 그 내용을 외워가며 준비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바로 윗층으로 올라갔다.


우리 방 바로 윗층에는 러시아 친구들이 쓰는 여자 기숙사 방이 있었다. 올라가자마자 굉음처럼 들리는 음악소리가 귀를 찔렀다. 문 앞에 서자, 그 소리와 함께 신난 러시아 친구들의 함성도 들려왔다. 마치 축구 경기장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마음을 먹고 문을 계속 두들겨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분을 두들긴 끝에 젊은 러시아 아가씨 한명이 나왔다. 매우 행복한 미소를 나를 바라보더니 다짜고짜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조..조용히 해줘..!!"

"뭐라고? 같이 춤추자!"


d1392eac-22b4-4ea2-8b2a-37c591b721ce.png GPT가 그려준 당시 상황.. 딱 이런 느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은 아예 듣지 않은 채, 러시아 친구는 나를 잡고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방에는 러시아 여자 친구들만 약 5명이 있었고, 그중 2명이 더 달려와 나를 가운데 두고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몸을 부비적거리지는 않았지만,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 해서 무섭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마치 식인 원시 종족이 사람을 가운데 두고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민망하고 당황한 나는 "조... 조용히 해줘..."라고 반복했다.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아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한 거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제서야 춤을 멈추고 이제는 함께 놀자고 하는 러시아 여자 친구들이었다. 방에는 보드카와 맥주, 러시아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새해 복 많이 받아" 한마디 남기고는 급히 방을 나왔다. 조용히 해달라는 말은 스스로에게 되내이기만 하고, 결국 도망치듯 나왔다.


소음은 밤새 이어졌다. 새벽 4, 5시가 되어서도 쿵쾅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빈도는 줄었지만 여전히 귀를 울렸다. 결국 밤을 꼴딱 새우고 나서야, 아침이 되어야 조용해졌다. 새해 복을 빌며 도망쳤던 나는 그날 이후로 기숙사에서 춤을 추자는 제안을 다시 받아본 적도, 윗층 여자 친구들과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날 밤, 러시아에서 이방인으로서 겪었던 불편함 속에서도 낯선 문화와 흥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춤추자는 제안이 당황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돌아보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환영하려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녀들과 함께한 춤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종종 추억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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