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이불 속에서 게임하는 법

게임은 해도해도 질리지가 않아요

by 크바스


KakaoTalk_20250811_155627053_03.jpg 내가 보유중인 GBA SP 포켓몬 도감 하우징

2003년,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가 최신형 닌텐도 게임기인 GBA SP 모델을 들고 왔다. 폴더처럼 여닫히는 디자인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백라이트 기능이 있어 어두운 곳에서도 게임할 수 있다는 점이 내겐 거의 과학혁명에 가까웠다.


그전까지 쓰던 GBC나 GBA는 백라이트가 없어서 밤에 게임하려면 스탠드 불빛에 얼굴을 비스듬히 맞추고 한 손으로는 화면 각도를 조절하며 포켓몬을 했다. 게임을 하다보면 목과 손목 근육이 먼저 단련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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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GBC는 백라이트 개조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 신문물이 내 품에 오려면 20만 원이 필요했다. 하루 용돈이 천 원이던 나에겐 6개월 넘게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꿈의 가격이었다.
(참고로 내가 다니던 영어학원 한 달 학원비가 70만 원이었는데도, 게임기는 안 됐다.)


결국 엄마에게 때를 무진장 썼다.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사 달라고 졸랐지만 소용없었다. 반항심에 집을 나가본 적도 있었지만, 엄마의 고집은 확고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집은 달랐다.


엄마가 이겼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엄마에게 돈 벌 기회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이태원에 있는 한 부동산 사장님을 소개해줬다. 업무는 간단했다. 전단지와 명함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돈 벌고 싶으면 직접 해봐.”
“좋아요. 꼭 벌어서 게임기 살 거예요.”


첫 아르바이트는 이태원 전역 상가를 돌며 부동산 명함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500장을 배포하면 2만 원. 계산해보니 5천 장만 돌리면 꿈에 그리던 GBA SP를 살 수 있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상가를 돌았다.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아이고, 학생이 이걸 다 하네?”
“공부 열심히 해!”
덕분에 과자도 얻어먹고 주스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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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라이트 기능에 화면까지 쩅쨍하다.

다만 500장을 돌리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명함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면 빨리 끝날 수 있었지만, ‘게임기는 정직하게 번 돈으로 사야 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한 장, 한 장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명함을 돌리고 또 돌렸다. 게임기만 생각하면 힘이 났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되자 알바할 시간도 줄었고, 모아둔 돈도 군것질과 문방구 뽑기 자판기에 조금씩 사라졌다.


결국 목표였던 20만 원은 채우지 못했다. 절망 그 자체였다. ‘밤에 게임할 방법은 도저히 없는 걸까? 자기 전에 포켓몬을 즐길 방법은 없을까?’


동네 게임점에 가서 구경하던 중, 게임보이 컬러에 끼워 쓰는 외부 라이트를 발견했다. 화면 옆에 집게처럼 끼우고, 길게 뻗은 목 끝에 작은 전구가 달린 제품이었다. 가격은 3만 원. 내 용돈에도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걸 샀다.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불을 끄고 포켓몬을 실행했다. 그런데 확대경은 너무 거추장스러워서 불편했다. 솔직히 조금 후회됐다. 그래도 이미 산 걸 어쩌나.


물론 백라이트 GBA SP처럼 세련되진 않았지만 전구 불빛 아래에서 게임보이 컬러를 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사천왕을 또 깨고, 여러 포켓몬을 잡으며 나는 다시 그 세계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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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교환으로 스타팅 포켓몬 3마리를 갖고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GBA SP는 못 샀어도 그 여름의 이태원 골목과 전단지 명함, 그리고 작은 전구 불빛 속의 포켓몬은 잊지 못한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았다. 생각해보니 그 라이트는 닌텐도 정품 게임보이 컬러 확대경이었다. 잘 보관해뒀다면 지금쯤 20만 원 정도는 했을지도 모른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어쩌면 그게 그 시절 내 진짜 ‘레어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끔, 중고 거래 앱을 켜서 게임보이 컬러 확대경’을 검색해본다. 결과는 늘 같다. 매물 없음. 아마 지금 팔면 GBA SP보다 더 비싸게 받았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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