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써글 Sep 20. 2020

만약 피터 팬이 회사원이라면···

청춘의 끝과 하드보일드 회사랜드

한때는 날아다녔던 피 상무


“피터 팬 군, 본인의 강점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


“네 저의 강점은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동안과 네버랜드에서 수십 명의 아이를 이끌며 쌓아온 리더십 경험입니다.”


   면접관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던 피터 팬은 면접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부진했던 필기 점수를 만회하고, SKY대 출신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며 최종 입사 합격을 하게 된다.


   입사 후 피터 팬은 학벌 때문에 무시당하는 게 싫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했고 밤낮없이 독하게 십수 년을 일한 결과, 결국 영업 상무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피 상무님, 승진 축하드립니다. 한잔 받으십시오. (소주를 따르며) 상무님 제 인생 멘토십니다. 회사생활 성공비결이 뭔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임원 승진 축하 회식 자리, 눈치 빠른 김 대리가 타이밍을 살피다 소주잔을 손에 들고 졸래졸래 피터 팬 상무의 테이블로 찾아와 말했다.


“김 대리, 술자리에서는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성공비결? 별거 없어. 나 때는 말이야. 막, 날아다녔거든···”


[와이프가 아들을 데리고 처가댁에 잠시 간 사이, 오랜만에 혼자 영화 ‘후크(Hook)’를 다시 보면서 ‘만약 피터 팬이 한국에서 회사원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상상해 보았어요.]

    

Photo by Ferenc Horvath on Unsplash
꼰대들도 한때는 피터 팬이었다?


   회사에서 한 업무의 히스토리를 파악하기 위해 옛날 자료들을 뒤적거리다, 우연히 한 상사의 신입사원 시절 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지금은 조직 전체를 호령하고 많은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그분의 코흘리개 시절, 아무것도 아닌 시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사진을 보고 난 후의 내 느낌은 ‘이 사람도 이런 때가 있었구나’, ‘지금과는 다르게 인상이 참 순했었네’ 였다. 과연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엇이 그를 지금처럼 바꾸어 놓은 것일까?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지금의 꼰대들도 한때는 순수한 피터 팬 같은 때가 있었다’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반론적인 결론을 내렸다.


   꼰대들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결단코 없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남을 도구처럼 여기고 함부로 상처 주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본 후 내 마음속에 작은 물음표 하나가 생겼다. 만약 십수년간 그가 겪었던 상황과 일들을 내가 똑같이 경험한 후에도 지금과 같은 비난과 욕을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강도가 아주 조금은, 병아리 눈물만큼은 줄어들지 않을까?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물음표를 마음속에 간직한 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상사에게 보고를 갈 때면 마음이 무겁고 불안했다. 그가 또 어떤 스티브 잡스 뺨치는 창의적인 꼬투리를 잡고 내 자존감을 박살 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여전히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변명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봤어, 당신은 그런 것도 안 하지’라는 일종의 자기 위안. 

'나는 그래도 당신보다는 대인배야'



이전 03화 조직, 그 견고하고 거대한 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