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런써글 Sep 27. 2020

조직, 그 견고하고 거대한 벽

청춘의 끝과 하드보일드 회사랜드

월급 25,600원, 나의 첫 조직 생활


   이유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남자에게 군대란 좋지 않은 기억 중 하나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2004년 겨울, 신병 교육을 마친 나는 헌병부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신병 교육 동기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전국각지의 부대들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제 각자의 군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기차를 타고 허리를 앞으로 굽혀야지만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커다란 더플백을 엉거주춤 맨 채, 한 어스름한 부대 앞에 다다랐을 때만 해도, 난 내가 겪게 될 군 생활을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했다.


   중대장에게 전입신고를 마치자, ‘맞고참’이라는 선임이 와서 나와, 나와 함께 이 부대로 배치받은 또 한 명의 신병(나의 자대 동기)을 교육실이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들에 대해 교육해 주었다. 사실 그것은 규칙이라기보단, 신병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에 대한 것으로, 오히려 ‘제한’에 가까웠다. 


1) 신병은 선임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음 2) 신병은 혼자 또는 신병끼리 다닐 수 없음(반드시 맞고참과 동행해야 함) 3) 신병은 문을 열면 안 됨 4) 신병은 걷거나 이동할 때를 제외하곤 자리에 각을 잡고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만 있어야 함 5) 신병은 맞고참을 제외한 다른 선임에게는 말할 수 없음 6) 신병은 PX를 이용할 수 없음 7) 신병의 군복은 매일 새것처럼 칼각이 잡혀있어야 하며, 군화는 이가 비칠 정도로 광이 나야 함 8) 위의 모든 규칙은 3주 후 신병 테스트를 통과할 때까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위 규칙을 어기거나, 신병 테스트에서 불합격했을 때는 다시 3주간 신병 기간이 연기됨


   규칙에 적힌 ‘신병 테스트’는 선임들의 서열, 부대에서 사용하는 용어, 후임이 선임에게 갖추어야 할 군 생활 예절 등이 빽빽하게 적혀진 A4 약 100페이지 분량의 OJT(On the job training) 북을 모두 암기하는 것이었다. 신병 테스트 날이 되면 모든 부대원은 한자리에 모이고, 병장들이 제시하는 페이지의 내용을 신병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암송해야 했다. 그리고 시험의 최종 합불여부는 최고참 병장들에 의해 판단되었다. 그건 일종의 ‘신병 괴롭혀서 길들이기’ 같은 것이었다.


   ‘신병 규칙’과 ‘신병 테스트’에는 신병들로 하여금 군 생활의 기본교양을 갖추게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신병에 대한 무시와 굴욕 그리고 군대라는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선임들 본인이라는 것을 뼛속까지 각인시키려는 교묘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부당하다는 걸 알았지만 괜한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우린 나름 열심히 규칙을 지키려 했고 테스트 준비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와 맞고참 사이에 몇몇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는 ‘이번 신병은 군기가 빠졌다’, ‘규칙을 무시하고 선임에게 반항하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각색되어 부대 전체로 퍼졌다.


   월급 25,600원, 시급 123원의 나의 첫 조직 생활은 그렇게 첫 단추부터 꼬였고, 약 1년 동안 우린 선임들의 조롱과 비아냥거림, 트집 잡음, 갈굼을 견뎌야 했고, 나는 ‘조직 생활’의 무서움을 그때 처음 경험하였다. 그것은 한 사람의 개인이 맞서기엔 너무나 비열하고 거대한 것이었다.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자유롭지 않은 자유시장경제의 회사원


   군대를 전역하고 3년 동안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지내다, 군대보다 돈을 많이 주는 회사에 취직했다. 군대에서도 신병 교육을 마친 자만이 비로소 이등병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우린 건실한 신입사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룹 신입사원 연수란 것을 받았고 교육 프로그램에는 (지금은 대부분 없어지긴 했지만) 군대의 향기가 물씬 나는 행군과 아침 구보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분, 입사하니 얼마나 좋아요? 일도 하고 업무도 배우는데 회사에서 돈까지 주니, 금상첨화 아닙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감도 그다지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강사들의 수업을 들으며, 회사원이 되려면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은폐 기술과 구라를 구라가 아닌 것처럼 말 할 수 있는 연기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던 중 한 강사가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했다.


“여러분의 월급에는 상사에게 듣는 욕 값이 포함되어 있어요”


   욕의 값이라니, 이 얼마나 자본주의적인 발상인가?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물론 강사가 한 말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앞으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상사에게 갈굼을 당하더라도 너무 상처 입지말라는 의도에서 한 말 인 것 같지만, 그 말속에는 회사생활의 본질 같은 것이 녹여져 있는 것 같았다. 


   회사원은 월급을 받기 때문에 상사에게 욕을 먹어도 된다는 대전제, 그것은 내가 군대에서 경험한 권력의 불균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전 02화 연봉계약서: 내 영혼에 매겨진 가격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