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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런써글 Sep 27. 2020

은밀하게, 깊숙하게 부서지는 우리의 영혼

청춘의 끝과 하드보일드 회사랜드

‘인사고과’라는 거미줄


   소는 우생(牛生)에 딱 한 번 등급이 매겨지지만, 회사원은 매년 등급이 매겨진다. 인사고과라는 이름으로 회사는 이 인간이 돈값을 제대로 했는지 못했는지를, 마치 도축장 고기 등급 매기듯 매년 평가한다.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고 평가받은 인간은, 진급도 차질없이 하고 다음 해 연봉도 올해보다 많이 받을 거지만, 반대로 값어치를 못 했다고 평가받은 인간은 진급 자격도 박탈되고, 까딱하면 인센티브조차 한 푼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관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측정해야 한다라고 말한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의 말을 회사는 잘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회사는 회사원 관리하기 위해 매년 측정고 평가한다. 그리고 회사원은 늘 본인의 가치를 상사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무언의 압박을 받는다.


   여기서 ‘인정’이란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정받고 싶든, 인정받고 싶지 않든 애초에 그건 전적으로 평가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말 죽어라 열심히 일했는데 인사고과가 좋지 못한 해가 있는 반면, 슬렁슬렁했는데도 상사와 케미가 좋아 높은 고과를 받는 해가 있는 것처럼, 평가자에게 어떤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 회사 내 한 인간의 등급은 좌지우지될 수 있다.


   남들의 시선에 비교적 무신경 했던 사람들도,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상사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의 판단에 의해 평가되어 진다는 불편한 진실. 평가란 내가 회사에서 일하고 존재하는 이유를 의미하기에 계속해서 나쁜 평가를 받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Photo by takahiro taguchi on Unsplash
회사 홈페이지에는 없는 진짜 인재상


   흔히들 취직하고 싶은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내거나, 면접을 보기 전에 그 회사의 인재상이 뭔지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을 한다. 각 회사의 홈페이지에 게시된 인재상을 보면 주로 글로벌 인재 어쩌고, 창의적인 인재 저쩌고 등등··· 그럴듯한 말들이 잔뜩 쓰여 있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그 회사의 진짜 인재상이 아니다. 그건 마치 ‘상기 이미지는 연출된 것으로 실제 이미지는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제품 이미지 컷처럼 남들에게 전시하기 위해 써 붙여 놓은 것이다.


   그럼 전시용 인재상 말고, 진짜 인재상은 어디에 게시되어 있을까? 회사가 원하는 진짜 인재상은 바로 진급자 명단 속에 있다. 누가 임원으로 승진했고 누가 집에 갔는지, 누가 요직으로 또는 한직으로 발령 났는지, 누구를 조직의 리더로 회사가 선임했는지가 바로 그 회사의 진짜 인재(자화)상이다.


“와~ 어떻게 OOO 부장승진 할수 있어요?”

“야, O 장 윗사람에게 엄청나게 잘하잖아?”


O 과장, 작년에 무슨 문제 있지 않았나? 어떻게 승진했지?”

“저 사람, 다른 건 몰라도 성과 하나는 확실하잖아요. 매출이 깡패지 뭐”


   연말, 회사 게시판에 진급자 명단이 뜨면 사내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동안 술렁술렁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충분히 진급할 자격이 있지'라는 여론보다, '왜 저런 사람을 진급시켰지'라는 여론이 우세한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진급이란 사원이 아니라, 관리자의 관점에서 결정되는 사안이기 때문에 그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진급자 명단’은 진급하지 못한 직원들에게 회사가 보내는 단체 메시지이며, 그 메시지엔 직원들이 본받아 하는 본보기’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회사는 절대 직접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인재상은 윗사람에게  잘하는 사람, 비록 비도덕적인 면이 있더라도 매출 성과를 초과 달성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은밀하게, 진급자 명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직원들에게 암시한다.


   회사원들은 진급자 명단 속 레알 인재들을 보며, 이 조직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기 위해서는(또는 높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는)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구나를 알게 되고, 비록 가슴으론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머리로는 선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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