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도 풍년이다’라는 말이 있다. 종종 신문지상에도 등장할 만큼 널리 활용되는 표현으로, 속된 말 ‘지랄’에 농사가 잘되어 수확이 풍부한 해를 뜻하는 ‘풍년’을 함께 사용하여 주로 ‘지랄 같은 일이 여기저기 매우 풍성한 상황’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이보다 조금 더 고급진 버전으로 ‘지랄의 낙수효과’란 게 있다. 낙수효과(落水效果)는 원래 ’고소득층의 부(富)가 저소득층까지 흘러내려 간다’는 경제용어인데 이를 응용한 ‘지랄의 낙수효과’는 고 직급자의 비인격적 언행(지랄)이 타고 타고 내려가 최하위 직급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평소 비인격적인 언행(지랄)을 하지 않았던 사람도, 빌런 상사로부터 갈굼 또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상사에게 당한 똑같은 방식으로 동료나 주변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지랄의 낙수효과’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직 행동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라는 일종의 보상심리와 '상사가 되려면 아랫사람을 저렇게 대해야 하는구나(또는 대해도 되는구나)'라는 삐뚤어진 학습효과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켜 지랄의 낙수효과의 파급력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고 직급에서 저 직급으로, 직급을 통해 내리 전수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직 전체로 퍼져 어느새 그 조직의 문화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지랄의 낙수효과로 인한 감정 폭력을 조직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구성원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학습하고 모방하게 되는 동시에, 서서히 타인에 대한 공격 행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양심의 가책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된다. 상사가 구성원에게 폭언하고 고성을 지르는 장면이 입사 초에는 불편하다가 나중에는‘저 인간 또 저러네, 오늘은 저 인간에게 보고하러 가지 말아야지’하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감정 폭력에 익숙해지고 무뎌진다는 건 언젠가 나도 무의식중에 타인에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상류에 있는 커다란댐의 방류로 인해 하류에 있는 수십 개의 댐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이로 인해 발생한 홍수에 무고한 주민들이 휩쓸리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이 지랄의 소용돌이 속에서는이제 누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누가 빌런인지 아닌지 더 이상 알 수 없다. 이쯤되면 조직 내 지랄은 말 그대로 풍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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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창조론 VS 또라이 진화론
회사 내 그 수많은 빌런과 또라이는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혹자는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이야기하며 사무실마다 일정 수의 또라이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마치 창조론과 같은 주장을 하는데, 나는 또라이에 관해서는 창조론보단 오히려 진화론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이 생존을 위해 진화하였듯, 회사원도 조직이라는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서서히 ‘비정한 회사원’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높은 나무의 잎사귀를 따먹기에 적합한 ‘긴’ 목을 가진 기린만 살아남고, ‘짧은’ 목을 가진 기린은 멸종하였다는 자연 선택설의 논리처럼, 조직 생활에 적합하게 진화한 사람은 조직으로부터 인정도 받고 고위직으로 승진할 확률이 높은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후배에게도 승진에서 밀리고 조직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조직 선택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조직 선택설’이라고 해야 할까?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깔아뭉개거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개 조직에 맞게 진화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비정하고 교활한 경우가 많다. 야망을 품은 개인이 성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진화를 선택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회사가 개인에게 조직의 논리를 앞세워, 성공을 위해 그리고 성과를 위해 비정하고 교활한 사람이 되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기도 한다.
회사에는 왜 내 주변보다더 많은 빌런들이존재하는걸까? 회사는 빌런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만 선별해서 채용한 걸까?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오히려 회사가 그리고 회사라는 환경이 그런 빌런들을 만들어 낸 건지도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독하게 굴어 그래야 네가 살아’라는 영화 <신세계> 황정민의 대사처럼, 자신과 가족이 살기 위해 독한 선택을 해야만 했던 이정재처럼, 살아남기 위해선 독해져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점점 빌런화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