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니까 용서를 바라지 마세요.
그 해 추석의 마지막 씬.
쟤 언제까지 서울에 저렇게 두실 거예요?
제가 아는 연예계 관계자한테 사진 보여줬더니 얼굴에 끼가 없대요.
그쪽 사람들은 사진만 봐도 그냥 다 알아요.
추석 당일, 온 가족이 모여있는 자리였다.
화목한 분위기 속 취기 있는 상태에서
'프레임 인'해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실력으로 '단독샷'을 가져가 버린 첫째 형부.
(*frame in- 인물이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 )
그의 공격적인 대사에 각종 애드리브로 받아치며
그날의 마지막 씬이 '나의 앞 날'로 집중되지 않고 무사히, 화목하게
"Cut! Okay!!"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캐릭터는 예상보다 많이 얄미웠고
본인은 힘이 되는데, 내가 끼가 없어서 못 띄어준다는 허세의 반복에 감정은 절정 직전으로 치솟았다.
[엄마] "그 관계자란 사람이 그래..?"
걱정스럽게 불합격 소식을 재확인이라도 하듯 물어보는 엄마의 말에
빙의되듯 눈이 뒤집혔고 속에서부터 끓어 나오는 우렁찬 소리로 평소의 발성 연습량을 대변하고야 말았다.
내가 화가 나고 억울했던 건
갑자기 동네 북이 돼서도,
진짜 관계자에게 그런 평가를 들었을까 봐서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그늘져버린 얼굴과,
첫째 언니의 '날 볼 면목이 없다'는 문자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면목 없다'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다.
다음날 미안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는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형부였던' 사람이 되었다.
( 그날 일로 인해서는 아니다.)
가끔 생각해본다.
용서라는 것을.
지난 일이고 사과를 받았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용서를 해주어야 하는 걸까?
어디서 들은 말처럼, 용서는 진정 나를 위한 것일까?
그렇기엔 잊고 싶어 노력은 할 순 있지만
용서는 할 수 없는 상황들이, 사람들이 있다.
일곱 살의 내가 보는 앞에서
부엌 가위를 들고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아빠.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대학로 신인이었던 내게
부모사랑을 못 받은 애 같다며 대놓고 미워했던 연출.
23년이 지난 지금도 부엌 가위를 볼 때마다 문득,
대학로에 연극 보러 갈 때도 문득.
그렇게 기억이라는 것은 종종 나를 어두운 어딘가로 끌어당긴다.
엄마를 때리고 나서 딸들인 우리를 앉혀놓고 아빠는 '거의 늘' 미안하다고 했다.
아빠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했다.
다음 날엔 엄마에게도 미안하다고 했고,
사소한 일에도 장난스럽게 미안하다는 말을 아주 잘했다.
엄마는 그 미안하다는 말이 정말 싫다고 했다.
애초에 미안할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받을 건 받아야 하므로,
사과는 일단 받는데
용서까진 바라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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