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넷의 여름이었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한껏 집중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니지먼트 대표, 매니저, 캐스팅 디렉터 등 연예계 관계자들의 사적 모임 자리였다.
들어도 모르는 그들만의 이야기에
그저 따라 웃고 따라 표정 지으며 분위기를 맞추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 저 팔뚝 봐.
원피스 터질 것 같아.
저 얼굴형으로 텔레비전에 나오겠다고?
허벅지 좀 보라고.
구두 부서지겠어.
왼쪽 맞은편에 앉아있던 한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보며 옆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직접적으로 나에게 '건네주신' 말이 아니라서
살을 빼겠다는 다짐의 말을 전할 수도 없이
처음 들어보는 원색적인 비난에 내 표정은 굳어져갔다.
시선은 아래로 떨어졌고
발은 모아졌으며 다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부서질 것 같다는 구두를 차분히 벗은 후에야 이불을 뒤집어쓴 채 끅끅 울었다.
어차피 혼자 사는데 크게나 울지.
다음날부터 난 음식을 삼키지 않았다.
먹어도 하루를 김밥 한 줄로 버티거나,
입에 넣고 씹은 후 검은 비닐봉지에 뱉어버렸다.
누가 잘 못된 다이어트 방법이라고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놓으면 온갖 음식을 사
폭식하는 듯 입에 넣었다가 검은 비닐봉지에 그대로 뱉어버리는 것을 반복했다.
이것이 식이장애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들이 말했던 체중이 되려 집착했다.
매일 오전 공복에 체중을 측정하고
먹은 음식과 시간을 기록하며 강박적인 행동을 했다.
탈모는 없었지만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했고
빈혈과 생리불순으로 생기를 잃어갔다.
비판과 조언, 비난은 다르다.
그날 무방비 상태에서 연속 총격을 맞은 것 같던 경험은
진심으로 그분께 감. 사. 하다고 전하고 싶다.
적어도 그 이후 어디 가서 체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는 않으니까.
또, 이 말을 하고 싶다.
168cm에 55kg은 날씬한 몸무게다.
그리고 모든 여자 배우들이 50kg도 안 되는 체중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매가 평범한 사람, 날씬한 사람, 통통한 사람 등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직업답게
다양한 체형과 외모의 배우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준다.
미디어를 보는 시청자, 특히 청소년들에게 말이다.
마른 연예인이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예능프로그램에서 여자 연예인들의 몸매를 비교하거나 체중을 측정하며
개그의 요소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마르고 군살 없는 연예인의 몸을 기준 삼아 다이어트를 한다.
이러한 미디어의 영향은 아무런 문제없는 본인의 몸의 단점을 찾아내고 의미 없는 '비교'를 하게 만든다.
정말 쓸데없이.
자, 이제 그때의 식이장애는 고쳐졌는지 걱정해주신다면, 괜찮다.
지금은 체중만 체크할 뿐, 씹고 뱉거나 먹는 시간과 양을 기록해야만 하는 강박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날도 김밥 한 줄을 사러 나갔다.
강렬한 여름 햇빛 때문이었는지 무엇인지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김밥집이 아닌 내과로 향했고,
내가 한 행동들이 식이장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날씬한데 왜 그러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보다
씹고 뱉거나 먹고 토하는 방법들이 침샘을 비대하게 만들어 얼굴을 크고 못생기게 만든다는 설명에
씹고 뱉는 행위는 그만두게 되었다.
우리나라만큼 마른 몸매에 집착하는 곳도 없는 것 같다.
작은 두상에 마른 몸.
'자기 관리=다이어트'라는 공식이 있는 것 마냥 살집이 있는 사람의 앞날을 쉬이 걱정해준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체중은 본인이 관리하는 것이 맞다.
조언이 아닌 상처가 될 소리인 줄 알면서도 내뱉는 오지라퍼들의 자기 관리가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