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있는 일이다.
촬영일정 빼두고 예쁘게 대본 프린트한 것 보며 연습하던 중에 이런 전화를 받는 일.
아.. 어쩌지.. 촬영감독이 아는 배우로 진행하기로 돼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대작도 아니고.. 내가 배우들 맘을 잘 알지!!!!!!!
내 목소리는 분노와 당황으로 막힌다.
연결해 주었던 캐스팅디렉터의 위로를 듣는 건지 하소연을 듣는 건지
그저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 괜찮아요 ‘ 뿐이었다.
그래, 늘 그렇듯 작품이 엎어질 수도 있고,
캐스팅이 불발될 수도 있고, 촬영이 연기될 수도,
촬영했음에도 통편집될 수도 있는 게 이쪽 일이다.
아쉽지만 예쁘게 프린트한 대본을 착착 세워 머얼리 방치해 두기로 한다.
여기까지는 오케이라 이거다.
리스트업(최종후보로 올라간 상황)된 상황에서
밀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늘 ’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속으로, 입 밖으로 자주 한다.
그래야 털어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얼마 후 넓지 않은 나의 마음에 스크래치가 나버린다.
촬영예정일이었던 날 아무 일도 없는 난
방구석 침대에 온몸을 밀착한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곤 기분이 안 좋거나 자랑할 거리가 없을 때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될 인별그램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때 데스티니처럼 내 눈앞에 떡하니 보인 사진.
바로 그 캐스팅디렉터와 한 여배우의
아주 친밀해 보이는 모습의 셀카들이었다.
그 셀카들은 배경이 촬영장임을 짐작케 했고,
해시태그들은 나의 배역이었음을 확신케 했다.
내가 있어야 할 촬영장소에 그녀가 있었고,
나와 함께 있었어야 할 아역배우가 그녀 옆에 있었다.
얼굴도 몰랐던 그녀가 괜스레 미워졌다.
그리고 더 큰 미움의 화살은 그 캐스팅디렉터에게로 향했다.
'아니 이런 사진을 왜 자기 인스타에 올려?'
자기 인스타에 올리지 어디에 올리겠는가.
'알고 보면 둘이 친해서 날 밀어내고 넣은 거 아냐?'
위험한 오해는 금지해야 한다.
천사와 악마가 양 쪽 귓불에 앉아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일희일비 금지, 다 된 밥에 재 뿌려져도 울지 않기가
올해 작은 목표였건만 무너져버린다.
이제 모든 화살은 나에게로 향한다.
'받아들이는 것도 못해?'
'고작 이런 일로 화난 네 모습이 한심해'
'결국 다 네가 못나서 그래'
이불을 확 뒤집어쓰며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정해 본다.
이불속에서 꿈틀거리며 언니에게 전화로 하소연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멈췄다.
mbti가 파워 t인 언니는 이렇게 말할 게 뻔했다.
”야, 이런 일은 톱스타들한테도 흔하잖아.
네가 계속 배우일할 거면 멘탈 잘 잡아야지. “
안 들어도 라디오다.
라디오는 대개 맞는 말만 한다.
많은 배우들이 이런 상황과 감정을 경험해 보았을 터였다.
배역을 뺏겼다고,
아니 다른 이로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무능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동정표를 얻으려는 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걸 알고 있다.
늘 예상치 못한 사고는 존재하고 그 이후의 대처가 중요한 법이다.
지나간 일은 이미 끝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대처다.
그리고 한층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이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배역을 뺏겼을 때의 무력함과 분노가 또 하나의 경험이 되고,
더 큰 성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오늘도 중얼거리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