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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Nov 03. 2020

인생을 뒤흔든 순간이 있으신가요?

[타인이 내 삶의 주도권을 쥐게 놔두지 마라 #15.]

그 전 이야기들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다시 하나씩 짚어봐야겠다.

나의 첫 창업 스토리는 2010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2월 졸업 후 첫 직장은 문화재단이었는데 나름 준공기업이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너무 박봉이었다. 아무리 칼퇴에 야근 수당을 준다고 해도 충족이 안 되는 수준. 거기다 업무도 너무 행정적이었다. 창의적인 일인 줄 알았는데 지루했다.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3개월 차에 알고 지내던 언니가 창업 제안을 해왔다. 그게 나의 첫 번째 창업이다. 6월 10일쯤 퇴사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창업'이 뭔지 몰랐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 버는 게 창업이지 정도로 생각했다. 그걸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믿으면 이뤄진다고 생각하던 시기였기에. 언니랑 같이 하기로 한 건 한국문화로 창업해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아,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내가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던 전형적인 반-애국자였다. 10대 때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에 환멸을 느껴서 이 땅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다(결혼도 안 했는데 왜 아이를 생각했나 모르겠다)고 생각했기에 무조건 졸업하면 해외로 이민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22살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행복할 줄 알았다. 전반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조금 외로웠고, 한국음식은 많이 그리웠고, 너무 추웠다(10월부터 5월까지 눈이 내리는 지역으로 -40까지 떨어지곤 했다). 그리 불편한 요소는 아니었다. 미국은 큰 나라니까.

하루는 엄마 친구 아들을 만났다. 재미교포였다. 한국말을 곧잘 했지만 미국에서 대부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솔직히 한국이 미국보다 나은 게 뭐냐.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다시 말하지만, 나는 반-애국자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말을 듣는 순간 배 아래쪽에서 마그마 같은 게 끌어 오르면서 화가 나는 거다. 이건 뭐지? 싶었는데 논리적으로 반박은 못하겠더라. 그게 더 화가 났다.

참 신기하게도, 이 날의 대화가 나에게는 큰 화두였다. 나는 왜 그때 화가 났을까. 한국이란 나라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때부터 계속 생각했다.

한국이 정말 나은 게 없나?

사실 '낫다'라는 건 상대적인 것이고, 특히 문화/역사적인 측면에서의 '우수성'을 논할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문화상대주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뭔가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갈증이 생겨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문화와 역사를 깊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긴가민가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뭔지 직접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와 '한국문화'에 대해서 논하다가 무형문화재분들을 인터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직접 겪어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때 지역을 찍으면서 대가들을 만나러 다녔다. 한지 만드시는 분, 고려홍주 만드시는 분, 씻김굿 하시는 분, 장구 치시는 분, 북 치시는 분.


다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 아직도 이 순간만 생각하면 설렌다. 개까지 문화재라는 진도를 내려갔을 때이다. 이때 진도북춤 문화재 할아버지를 찾아뵀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으니 인심이 좋을 때다. 청년 둘이 왔다가 밥도 주고 며칠을 재워주셨다. 그리고 주변에 유명한 분을 다 소개해주셨다. 이때부터 징검다리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때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집밥이 이렇게 맛있다고?라는 것이었다. 역시 음식 맛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할머니께서 김국을 시원하게 해주셨는데 세상에 이런 맛이!!! 김에서 이런 감칠맛이!!! 너무 맛있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5일장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가서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주막에 들어갔다. 주막집에서 만든 오미자 막걸리를 주셨는데 세상에...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마신 막걸리 중에 가장 맛있는 막걸리는 그 집에서 만든 오미자 막걸리이다. 이때부터 내가 지방을 가면 꼭 그 지방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막걸리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도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는)

뭐 어쨌든 음식은 사이드일 뿐이다. 적어도 내 인생을 바꾸진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장구 치시는 분을 소개해주셨다. 이렇게 소개하면 감이 안 올 테다.


진도는 씻김굿으로 유명하다. 나도 그때 진도를 내려가서 알았는데 굿에는 강신무와 세습무가 있단다. 강신무는 소위 말하는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을 말하고, 세습무는 말 그대로 집안 대대로 세습되는 무속인을 말한다. 집안 대대로 세습되는 경우는 주로 남쪽에서 나타나는데, 그렇기에 음악과 춤이 발달되어 있다고 했다. 진도는 세습무라서 악사 예능보유자(무형문화재)가 많은데, 그중 가장 유명한(내가 아는 선에서) 분이 박병천 선생님이시다. 이 집안이 3대인가 4대째 세습무를 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박병천 선생님은 내가 방문했을 2010년에 이미 돌아가셨고 동생분이 계시다고 해서 소개를 받아 갔다. 아흔이 넘은 분이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와! 이분이 장구를 치신다고? 살짝 의심도 했다. 죄송합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이 순간을 녹화하지 못한 나 자신을 늘 자책하곤 한다.

박 선생님은 자기 몸집의 반 정도 되는 장구를 들고 오시더니 강당 한가운데 앉아서 장구를 치기 시작하셨는데 그 첫 가락에 나는.

이건 표현하기 매우 힘들다. 이건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공간의 휘어짐 현상이랄까. 공간이 흔들리면서 그 바람 같은 것이 내 몸을 뚫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압축된 에너지의 향연이랄까. 근데 그게 내 마음속 깊숙이 숨어있던 어떤 코드를 건드린 것 같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켜켜이 쌓여있던 한국문화의 농축된 정수를 느낄 수 있구나 깨달았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의 울림이 이에 공명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울림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DNA가 있다는 게 한국인의 정체성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거창해서 거짓말하는 것 같지만 느끼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른다. 이걸 계기로 '한국문화'에 확신이 생겨서 다른 무형문화재 분들 인터뷰하러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공부한 내용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만약 지금처럼 한국문화로 사업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느 정도의 시장이 형성된 시기였다면 어떻게든 여러 가지 시도해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문과생이었고, 이상만 높았다. 몇 개월 동안 이렇게 저렇게 작업을 계속했지만 수익구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아둔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시기가 오자 일을 접고 회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시기의 경험으로 나는 한국인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뼛속 깊이 깨달았다. 역시 명심보감이 옳았다. (명심보감에는 '한 가지 경험에 한 가지 지혜를 얻는다'고 나와있다.)


아직도 한국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꿈은 가지고 있다. 그걸 실현시킬 모델도 고려하고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꼭 할 것이다. 그때가 지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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