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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Mar 24. 2019

만약, ~한다면? 가정법의 함정

[타인이 내 삶의 주도권을 쥐게 놔두지 마라 #9.]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만약 돈이 많다면, 연인이 있다면, 안정적인 직업이 있다면, 머리가 똑똑하다면, 그러면 나는 행복해질 것 같아. 내가 인생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내가 만약 ~한다면, 행복해질 거다'라는 어법이다. 행복은 조건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이 너무 많아 과부하가 걸릴 때쯤 나는 이런 상상을 했다. 내가 만약 며칠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간다면 그럼 난 좀 더 여유롭고 행복하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그 만약의 상황을 달성하기 위해 16개월 만에 휴가 비슷한 걸 떠났다. 그냥 휴가만 가기엔 마음이 편치 않아서 풍경 좋은 곳에서 제품 촬영까지 끝내기로 마음먹으며.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귀요미 캐릭터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내 기분도 저만큼 날아갈 듯했다.


제주도는 3년 만에 왔다. 운전면허도 없이 혼자 호기롭게 내려갈 때는 2박 3일이 이렇게 드라마틱할 줄 몰랐다. 


지인이 세화리 구좌읍에 한 달 정도 묵고 있다 하여 함께 머물기로 했다. 첫날 도착해서 공항버스를 타고 세화까지 가는데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월정리 근처 풍력발전기 모습



버스에서 바라본 풍경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마을마다 특유의 색채가 있었는데 특히나 풍력발전기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런데 제주도에 도착한 후에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행을 시작하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배도 아팠고 열감도 있는 듯했다.  


제품 테스트 진행 중



저녁까진 어떻게든 약으로 버텼다. 첫날이었기에 지인과 함께 제품 테스트를 진행하며 사진도 찍고 인생 이야기도 했다. 제품 개선 방향을 이야기했더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프니까 좋아하는 맥주도 다음 날로 미루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비자림으로 향했다. 세화리에서 버스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인 듯하여 사진 촬영에 적합하면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싶어서 숲으로 정했다. 이튿날 아침부터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괜찮을까 걱정하며 집을 나섰다. (아래 동영상에서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느끼실 수 있을 듯하다.)

세화 앞바다에서 바람을 맞으며 제품 촬영

 

비자림은 처음 가보는데 어머니랑 통화를 했더니, 거기 혼자 가면 위험하지 않냐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벌써 30대 중반의 성인인데 어머니 눈에는 내가 아직 어린이로 보이나 싶어 좀 웃겼다. 그런데 또 위험하다 하시니 살짝 머뭇하는 스스로에게 당혹감을 느끼며 비자림으로 향했다.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비자림 초입


푸른 내음 맡으며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날이 흐려서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아 이리 찍고 저리 찍는데 약효가 떨어졌는지 다시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2시간 정도 사진을 찍었다.





비자림에서의 1차 촬영을 마치고 세화리로 돌아가 카페에서 2차 촬영을 진행하려는데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비바람도 거세져서 나중에는 돌아가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일단은 숙소로 향했다. 몸에서 열이 나길래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낮잠을 자고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아 저녁 먹고 9시쯤 다시 잠들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에 돌아가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이틀 째 일정이 몸 상태로 어그러진 것이다. 잠만 15시간 정도 잔 듯하다. 날씨랑 몸상태가 받쳐주지 않았고 촬영한 사진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 하나 푹 잔 것은 만족스러웠다. (서울에 도착하니 몸이 멀쩡한 게 아닌가?! 여행 앓이 같은 거였나 싶었다.) 

서울에 돌아와 남은 일을 처리하고 집에 가는데 노을이 눈을 사로잡았다. 동시에 2박 3일간의 여정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촬영만 생각하면 서울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찍어도 된다. 굳이 제주도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지도. 그래도 오랜만에 숙소를 제공해준다는 지인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그리고 나에겐 정말 휴가가 필요한 듯했다.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보니 여행을 가면 더 행복할 거란 나의 예상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건 차치하더라도 여행을 가서 특별한 거라곤 환경이 달라졌다는 것? 환경이 달라졌다고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세화리 카페 페어리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대학교 때 여행 동아리 회장이었고, 회사 다닐 때 휴가 쓰고 국내 도보 여행을 다녔으며, 갈 수 있다면 온갖 극한 여행은 자진해서 준비했던 내가, 알고 봤더니 생각보다 활동적인 여행을 그리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는. 그래서인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아픈 배를 달래 보자고 근처 카페에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그때였다. 자몽차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본 2시간, 가장 잉여로웠던 자발적 멈춤이 나를 풍요롭게 한 순간이었다.



여전히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사업이 좀 더 잘 되면, 돈이 더 많으면, 가끔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이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그런 환상. 그런데 그런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지금보다 더 풍족할 순 있겠지만 나의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결국엔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조건이 바뀌어도 여전히 나는 비슷한 루틴의 생활을 하면서 즐겁게, 가끔은 스트레스받으며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드니 오히려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졌을 때도 이 일을 즐겁게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발판을 마련하고 습관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촬영한 사진을 남겨본다.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열심히 만든 제품을 사진에 담는 과정은 숭고하게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하면 프레임 내에 제품의 예쁜 모습을 담을 수 있을까, 제품에 깃든 우리의 마음과 철학까지 카메라에 담길까 등등을 다 고려한다. 생각해보면 세심하게 준비하는 내용들도 촬영 기술의 부족함으로 100% 구현되지 않는 듯하여 아쉽다. 


필요하다면 서울에서 2차 촬영을 진행할 예정인데, 혹시 사진 전문가님이 조언을 주신다면 더 잘 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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