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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현 Apr 07. 2019

그때는 목표 달성 후 허무했다

[타인이 내 삶의 주도권을 쥐게 놔두지 마라 #10.]


좋은 기회에 20대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여 친구들의 고민이 뭐냐고 물어봤다. 어떤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학교 자유게시판에 들어가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게시물에 좋아요가 많이 달려요. 근데 대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들도 왜 사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말만 기다린다 이런 글들을 많이 올려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나도 왜 사는지를 끊임없이 물어보던 사람이었다. 항상 그때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 오는 알 수 없는 상실감, 허무감이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허무함은 대학교 1학년 때 찾아왔다. 나는 고 1, 2학년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고 3 때는 정말 열심히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까지 등교해서 자율 학습하고 저녁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선식을 먹은 후 자습을 했고 야자가 끝난 10시 이후에도 11시까지 삼삼오오 모여 자율 학습을 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버티다가 여름이 지난 후에는 체력이 달려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나를 버티게 한 건 '대학교를 가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교 1학년, 주 5일을 모두 1교시로 채우고 단 한 번도 지각과 결석을 하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 다를 것 없는 대학 생활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열심히 했으나 무엇을 위해 열심히 하는지 몰랐다. 고등학교 때도 이유를 몰랐는데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유를 모른 채 질주하는 내 모습이 힘들었고 좌절했다. 1학년을 끝내고 나는 명상센터에 들어가 수련을 하기도 했고 2학년 때부터 심리학 전공을 시작했기에 상담도 부지기수로 받았다. 여전히 목표는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벗어나는 게 나의 유일한 탈출구라 믿었기에 당연한 수순처럼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그때도 열심히 했다. 하루는 미국인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버드 대학교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런- 이 친구가 하버드를 모르네???????? 세계 최고의 대학 하버드를 모른다고????????? 물론 내가 갔던 동네가 주민 2천 여명 정도 되는 쌩 시골이었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근데 그 친구가 대답이 걸작이다. 어떻게 하버드를 모르냐고 흥분해서 물었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내가 다니는 대학이 최고의 대학이지 다른 대학을 굳이 내가 알아야 하나?'. 나는 이때 큰 충격을 먹었다. 벌써 12년이나 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으니. 하버드를 모른다는 사실보다 이런 마인드로 살 수도 있구나, 그래도 괜찮구나 라는 관점의 전환에 충격을 먹었다. 그때 깨달았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관념 속에서 스스로를 옥죄고 있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래도 다시 열심히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내가 두 번째로 열심히 해서 성취했던 건 직장이었다. 나는 원래 무역회사 고무 플랜테이션 무역 파트에 가고 싶었다. 한동안 서류 전형에서 계속 탈락하기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소서와 면접 준비를 하는 대규모 모임에 등록했고 소모임을 2개 정도 함께하며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다행히 원하는 회사에 들어갔고 비슷한 광물 투자사 관리 부서에 배치받았다. 근데 뭐랄까,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달랐다. 회사는 단지, 뭐 당연히, 회사의 이익을 위한 의사결정을 내렸고, 해외 투자이다 보니 세계정세에 좌지우지되며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으며, 사회를 위한 보람찬 일도 없었다. 고민만 하면서 주 3~4일을 회식으로 보내고 겨우겨우 버티는 생활을 이어갔다.


만약 생각했던 것과 현실이 동일했다면 허무하지 않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애초에 목표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허무했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목표는 단지 그 관문을 넘어가는 것에 있었다는 자각. 그냥 경쟁에 이기는 것이 나의 목표였구나 싶은 생각. 그래서 나만의 결승선을 설정하고 그걸 넘었을 때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 만약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면 그것의 달성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일상의 즐거움을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과정이 즐거웠다면 비록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비슷한 대안을 찾아서 인생을, 일상을 확장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최고의 대학 '하버드'를 들어가는 것이 목표가 아닌 자기 인생 여정을 '최고'로 만들어 버리는 미국인 친구처럼.


퇴사하고 사업을 시작한 지금, 오랜 시행착오 끝에 이걸 깨달았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바로 그런 일이기 때문이다. 점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을 희생하는 삶이 아닌, 일상의 행복과 충만을 유지하면서 나의 보람과 실적 향상을 위해 일하고 있기에 실질적으로 말하면 이 일에는 목표가 없다. 일 자체가 목표이자 삶이기에. 그래서 여기엔 회의감도 상실감도 없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네가 그래서 뭐가 달라지냐고' 묻는 물음에 비록 큰 일은 못 할지언정 하나의 촛불이 되어 한 공간을 비춘다고 대답할 수 있듯이, 나의 몸짓이 씨앗이 되어 누군가에게 생이 되고 희망이 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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