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엄마는 죄가 없다

시모라는 거울에 비친 나

by 은조



그의 전화기를 뺏아 시멘트 바닥에 던졌다. 벌벌 떨리는 몸을 두 팔로 끌어안고 손가락을 물어 뜯으며 빠르게 골목을 오갔다. 구역질이 났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에서 시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00아. 여보세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서 소리를 질렀다.“악!” 민폐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수치심도 없었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악다구니를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전화가 끊겼다.


신혼집은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었다. 남편은 근처의 한 시골 마을의 공중보건의였고, 나는 그를 따라 시집 온 무직의 젊은 여자였다. 주말 부부를 예상하고 회사 근처의 집을 구하려던 때가 있었다. “따로 살거면 뭐하러 결혼을 하니. 그런 결혼 하지 마라.” 시부모는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챙기라고 압박했다. 시모는 '뚱뚱한 여자는 시부가 질색하니 살쪄서는 안된다’는 말로 외모를 단속하고, ‘집에서 못배워서 쌀 씻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겠다’며 살림을 가르치고, 식사 시간마다 메시지를 보내 아들이 먹는 것을 확인했다. 평범한 한국 여자인 나는 시모의 불쾌한 행동을 따져 묻지 못했다. 신혼 초에는 울기 바빴고, 울화가 쌓이자 애꿎은 남편에게 화를 냈다. 부부 싸움은 짙어졌고, 종국에는 무기력했다. 먹지도 뱉지도 못하는 입덧까지 겹쳐 결혼 초기를 꼬박 누워서 지내야 했다.


남편과 친정에 간 날이었다. 데이트를 가자며 남편 손을 당겼다. “우리끼리 어떻게 그래.” 부모의 눈치를 보는 남편의 염려가 무색하게, 엄마는 “나야 밥 안하고 좋지.”라며 화답했다. 메뉴에 어울리게 온 벽을 노랗게 칠해 놓은 카레 가게는 따뜻하고 자극적인 향신료의 냄새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입맛이 돌았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는데 남편의 전화가 울렸다. 시모였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다 마침내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뜨거운 카레를 한 숟갈 먹었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 다시 시모였다. “네. 홍대에서 일정이 있어서 신촌 먼저 왔어요. 일만 보고 이따 밤에 넘어갈 거에요.” 남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향에 올 때면 항상 친정보다 시가에 먼저 들렀다. 그것이 예법에 맞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른들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시모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을 밝혔으며, 우리는 부모를 두려워 했다. 남편이 겨우 달래서 끊은 전화가 다시 울리기를 대여섯 번, “잠깐만” 남편은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음식을 푹푹 떠먹으며 아직 비비지도 못한 남편의 접시를 봤다. 다 식어 말라버린 카레가 어쩜 이렇게 내 마음 같은지.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 한쪽 구석에 머리를 박고 전전긍긍 하고 있는 저 무능한 어른. 분했다. “스피커폰으로 바꿔.” 내가 속삭이자 그는 미간을 구기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바싹 붙어 휴대폰 스피커에 귀를 갖다 댔다. 시모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그러니까 미영이네 엄마가 그럴 줄 알았지. 애가 아주 배운 데가 없네. 이런 경우 없는 집안이 다 있어!” 그의 전화기를 뺏아 시멘트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종이와 펜을 사오라고 했다. 각서를 쓰라고 할 참이었지만, 눈물만 났다. 울며 그 동안 받은 상처와 압박, 우울에 대한 변상를 요구했다. 사과의 조건은 평생 남편의 본가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 후, 그 일에 대해 사과한 것은 시부였다. “니 엄마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네가 좀 마음을 넓게 써주면 안되겠니?” 늙고 우아한 남성의 사과. 시모는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할 때마다 시부 핑계를 댔다. ‘네 아버지가 궁금해 하시니까, 네 아버지가 화를 내시니까, 네 아버지가 조금 설익은 밥을 좋아하니까, 네 아버지가 날씬한 여자를 좋아하니까.’ 하지만 직접적으로 모욕을 준 적이 없었으므로 시부가 나를 조금은 아낀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이날 처음으로 제대로 시부의

권위에 깔렸다. 남편과 닮은 이 중년 남성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마음에 진짜 나의 욕구를 포기했다. 평생 시가에는 발길도 안하겠다는 후련하고 배포 넘치는 각오를 한 달도 지키지 못했다. 시모가 느닷 없이 사과한 것은 한참 뒤이다.


결혼 후 두 번째 설날, 시모의 단골 목욕탕에 갔다. 시모는 명절 음식을 차려놓고 목욕탕에 가는 건 가족의 문화라고 했으나, 희한하게도 남편은 따라 나서지 않았다. 시모는 나에게 세신을 시켜주겠다며 돈을 내었고, 검은 코르셋을 입은 세신사가 나의 온 몸을 닦아 주었다. “어머니가 좀 별나죠?” 그녀가 말했다. 그날, 싸구려 로션 향이 가득한 대중 목욕탕 탈의실에서 속옷만 입은 시모가 말했다. “세신 처음 받아 보니?”로 시작한 사과는 길고 긴 인생 조언을 거쳐 “네가 그런 아이인 줄은 몰라서 그랬지. 미안하다.”로 끝났다.


어쩌면 해석오류 : 창이 있음 뭐해.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는 갓 결혼한 여성의 시가 부적응기를 그린 만화다. 작가는 며느라기를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어 사랑받기 위해 자발적인 도우미가 되는 시기(時機)라고 정의했다. 나 역시 질풍 같은 시절을 겪으면서도 며느라기를 열심히도 수행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애교를 부리는 아이들을 앞세워, 귀여운 며느리가 되는 것은 쉬웠다. 때로는 시모 역시 손주들에게 다정하고, 다른 가족에게는 호방한 어른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시모를 점점 미워한다. 다른 이는 이미 잊었을 예전 일을 반추하며,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수집한다. 모든 인간은 실수할 수 밖에 없거늘, 늘 그분에게 유독 쪼잔하고 치사하다.


모순되게도 이 글은 시모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아니라, 시모라는 거울에 비친 내가 미운 것이 아닐까. 나에게 시모는 가부장제의 현현이다. 시모의 폭력성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받은 차별, 불합리한 시집살이, 남편과의 불평등한 위계 등 과거의 불공정한 대우에 시어머니라는 권위, 아들의 가족을 길들이고 싶은 욕구, 손해 보고 싫은 마음 등 현재의 욕망이 버무려진 것이다. 가부장제의 유산과 신자유주의적 법도의 화학작용에서 나온 이미 상한 것들. 안타깝게도 나의 피에는 같은 정서가 흐른다. 나는 그녀를 통해 스스로 가부장제에 부역하고 있으며, 가부장제 질서의 최하층에 무직의 전업주부인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통장을 신청할 때나, 카드 결제를 할 때, 설문에 응하거나, 서류를 작성할 때 [주부, 학생, 무직]을 직업으로 고르며 사소하지만 깊은 상처를 느낀다. 남편에게 생활비를 요청할 때는 수치스럽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는 과속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덜컹거린다. 집안일과 아이 돌봄의 챗바퀴 속에 내가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다. 시가는 나의 못난 부분을 확대하는 현미경이다.


내 마음 속에는 거대한 시모가 나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다. 나를 심판하고 비난하며 헐뜯는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 살면서…’, ‘게으르게 집을 엉망으로 해놓고서…’, ‘나이 들면서 점점 감각이 떨어지네. 더 이상 의미 있는 일을 하긴 어려울 것 같아.’ 같이.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든 허깨비다. 허깨비 위에 시모의 형상을 씌운다. 시모는 죄가 없다. 소망이 있다. 나를 사랑하고 싶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나를 하찮게 여기는 일을 멈추고 싶다. 엄마로서, 경력단절 여성으로서, 나의 삶과 꿈을 사랑하고 싶다. 여전히 다양한 시도할 수 있는 나의 젊은 삶을 응원한다. 이것이 이 글의 허무한 결론이며, 이글은 나를 향한 응원가다.



그레이가 말했다. "모야 그게. 조금 더 솔직한 글을 써보라고."



[덧]


샬롯 웰스의 [애프터 썬]은 아빠와 딸의 휴가를 그린 영화다. 서른의 아빠와 열한 살의 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함께 살지 않는다. 영화에서 아빠와 딸의 대비는 극명하다. 젊은 아빠는 삶이 힘들다. 열한 살 딸에게는 호기심과 열정이 가득하다. 아빠와 같은 나이가 된 딸은 회상을 통해 아버지를 응원한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삶은 연결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독립되어 있다. 영화의 후반부, 부녀는 낡은 플라스틱 부표 위에 앉아 꽤 먼 바다 위에 불안하게 둥둥 떠있다. 아빠는 말한다. “아빠에겐 뭐든지 말해도 되는 거 알지? 이 다음에 나이가 들어서…” 아이는 “응”하고 대답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은 안다. 아이는 어떤 얘기도 아빠에게 하지 않을 것이고, 아빠는 아이의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할 것이다. 외롭고 독립적이며 각자에게 입체적인 삶.


다른 장면에서, 아빠의 나이가 된 딸은 여행지에서 아빠가 거금을 들여 구입한 까펫을 밟으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부모의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삶의 고통에서 딸을 꺼내주지는 못하겠지만, 마루 바닥의 냉기에 놀라지 않도록 할 수는 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지는 못하더라도, 평생 가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 수 있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을 오래된 페르시안 카펫이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한다. 감각적인 장면들에 혼을 뺏기기도 했고.


샬롯 웰스, [애프터 썬]의 한 장면




[과제글]

이글은 [서이제 소설 창작교실: 기억의 재구성: 믿을 만한 이야기] 과제로 샬롯 웰스의 [애프터 썬]를 보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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