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가는 행렬에서 멈춰 서기
우리는 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어.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나의 죽음은 아닙니다.
나는 꼭 구 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구 년 전이면 아득하게 먼 시간은 아닌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결혼이 흔했습니다. 출산도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습니다. 세 아이를 낳았고 아빠의 느긋하고 꾸준한 성격을 닮으라고 ‘두터울 후’를 돌림자로 주었습니다. 쉬이 지쳐가는 피부만큼 빠르게 날 서고 탱탱했던 사회적 감각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느슨해져만 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세련된 것을 입히고 남들 다한다는 장난감을 사주는 게 왜 그렇게 목매달 일이었을까요. 그렇게까지 내 삶을 장악할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몇 년이 지나 육아라는 집중력에서 조금 벗어나 뒤돌아보니 아이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애미애비라는 울타리도 나름 튼튼하게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육아에 집중하는 시간은 사실 동물적인 본능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혹은 아이들을 좀 더 안전하게 독립시키기 위해 방법은 다를지언정 모든 부모들은 요란을 떱니다. 나 역시 그때는 그것만 보였습니다.
뒤돌아볼 시간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수 없이 고민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침마다 책상 위에 비어있는 큰 종이를 깔았습니다. 년 단위, 월 단위, 일주일 단위, 하루 단위의 계획표를 썼다 구겨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여전히 삶은 오리무중이었고, 시선을 잡아끄는 멋진 일들은 세상에 널린 듯했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줄어만 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고민이었습니다. 몇 년 만에 들여다본 뉴스와 텔레비전은 노동을 하지 말고 돈이 돈을 벌게 하라는 슬로건이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인건비 상승은 미미한테 복리의 마법은 우리를 내려올 일 없는 높은 언덕으로 데려다 줄거라 했습니다. 성장은 지수함수를 그리고 있고, 개인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계좌를 개설하고 주식을 샀습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부동산 주식 등등 자산을 늘려서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에 한 달 정도 동승한 뒤 하차했습니다.
이 빠르게 달리는 열차에서, 차창을 바라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주장하는 이 열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나의 어릴 때 꿈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업을 갖겠다, 첫사랑은 어떤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등등 구체적이지만 실체가 없는 꿈을 합치면 수백 가지가 넘겠지만, 연거푸 생각하며 내 세계이길 희망했던 꿈은 두 가지입니다.
내 꿈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꿈은 발이 바닥에 닿아있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쓰고 있는 나도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불안하고 마음이 붕 뜨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차분하고 바닥에 내려앉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앉아 있는 듯한 현실감과 안정을 희망했습니다. 빠르고 허상이며 미래의 가치에 초점을 두는 모든 것이 나에겐 불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둔해진 지금으로서는 예민하게 이 느낌을 구별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두 번째 꿈은 아이 때의 마음을 자산으로 쓰겠다는 꿈이었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아이 때의 마음을 잊지 말고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윤색되고 각색된 기억이지만 이 꿈은 나의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때, 이 꿈을 꺼내어 특별한 사전으로 이용합니다. 나의 큰 아이가 한번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아이 었던 적이 있어서 나를 이해할 텐데, 나는 어른이었던 적이 없어서 엄마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어. 엄마 정말 힘들었겠다.” 아이의 생각이 이럴진대 아이의 삶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 제가 함부로 몰이해로 아이를 떠밀 수 있겠습니까.
특별하고 소중한 삶을 보내왔지만 아이를 키우는 구 년은 나를 뭉툭한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아이의 연필을 집에서 칼로 깎아 보내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항상 그 끝을 날카롭게 만들려고 멀쩡한 흑연을 갈아냅니다. 옆에 앉은 아이는 희한한 일도 다 봤다는 듯 “뭉툭하면 안 돼?”합니다. 그때부터 뭉툭한 연필을 아이 필통에 넣어 보냅니다. 끝이 부러지지 않고 몇 날 며칠이 갑니다. 정말 훌륭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얇고 섬세하며 흐린 끝이 가는 연필이 언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삶의 군더더기를 삭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날카롭고 섬세하게 제련된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갑니다. 멈춤 사인이 시뻘건 얼굴을 들이밀어도 바쁘게 달려가느라 표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중간에 굴러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무서운 병이 이렇게 흔해지고, 몸을 해치는 것들이 버젓하게 상품으로 둔갑합니다. 대형트럭 행렬이 실어 날라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쓰레기는 더 큰 배를 타고 날아가 저개발 국가의 산길과 물길을 막습니다. 부실하게 쌓아 올린 높은 건물은 몇십 년 버티지 못하고 쓰레기로 둔갑합니다. 부수고 세우고 부수고 세우고 하는 발전에 대한 환각은 파멸로 가는 진실을 숨깁니다. [1]
숨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숨기는 자에게서 빼앗아 와야 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진실과 알 권리를 위해서 우리가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9월 한 기사는 말했습니다. “전 세계 환경운동가 피살 지난해 ‘역대 최다’ 227건”. [2] 차가운 이 기사의 제목이 숨어있는 웅변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요. 왜 이같이 어렵고 무서운 일을 개인이 맡아야 합니까. 왜 이런 일을 시작하고 있는 걸까요. 그들의 찾으려던 진실과 진실을 숨기고 있는 자들은 무엇을 위해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요. 돈?
나는 왜 갑자기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것들의 이면이 궁금해진 걸까요. 아무리 손가락을 꼽아보아도 내가 살날들에 위기가 찾아온다고 해도 나는 이 부유하고 편리한 삶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쓰레기 무덤 위에 있는 코끼리도, 뱃속에 100kg의 쓰레기를 넣고 죽음을 맞이한 후 해변가에 쓸려온 향유고래도 마음 아픈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을 것으로 착각해 자식에게 먹이는 북태평양의 바닷새 알바트로스의 이야기[3], 공장형 농장에 살며 누운 자세로 케이지에 묶여 남의 새끼들에게 젖을 주는 출산 기계 모돈의 이야기 등 생명이 탄생하고 자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들이 마치 내 새끼 같아서, 뼈와 살이 갈리는 아픔이 느껴져서 마음이 짓눌린 채로 있을 수는 없게 합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주저리주저리 써왔던 나의 구 년, 바로 아이들 때문입니다. 부모가 된 이후부터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나의 엄마는 운동회 때 넘어져 무릎에 큰 상처가 생긴 나에게 “무릎이 이래서 커서 미니스커트도 못 입으면 어쩌냐”며 미래의 나의 패션에 대한 걱정까지 대신해줬습니다. 아파트 한 채 못 가지면 어쩌냐. 번듯한 직장을 못 가지면 어쩌냐. 똑똑해지지 않으면 어쩌냐. 가난해지면 어쩌냐. 못 생겨지면 어쩌냐. 숱한 걱정들 때문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사교육도,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도, 경쟁에 끼어들어 불공정 경쟁을 만들고야 마는 부모들의 열성도 마치 사랑인 양 용인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2021년을 사는 평범한 부모인 나의 걱정은 이것입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먹이는 게 상품으로 눈속임된 쓰레기이면 어쩌나. 내가 가르치는 게 경쟁력이라고 불리는 타인을 해치는 칼이면 어쩌나. 아이들이 갖고 노는 게 알바트로스가 제 새끼에게 먹일 바닷 쓰레기 중 하나가 되면 어쩌나. 쓰레기가 널린 바다를 여행하며 쓰레기는 원래 바다에 있던 것으로 착각하면 어쩌나.
째깍째깍 기후위기시계는 속도를 높입니다. [4] 지구의 생태용량이 이미 초과되었음을, 날 선 기후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2-3년 단위로 덮쳐오는 팬데믹은 생명다양성 위기가 초래한 되돌릴 수 없는 우리 삶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못하면 어쩌나. 성장 일변도의 세상에서, 언젠가 소수의 사람과 수많은 인공지능이 삶의 방식까지 지배하고 말 거대한 빅 테크 기업이 장악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아이들일 수 있고, 진실된 스스로를 찾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나의 걱정이고 숙제입니다.
내 꿈은 아이 었을 때의 마음을 기억해 세상에 두 발 붙이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이 시대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습니다. 다른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조사를 할 것입니다. 엄마로서 2021년 10월을 사는 사람으로서, 생명으로서, 다른 이를 해치지 않고 더불어 행복한 방법에 대해서 배워나갈 것입니다.
[1] 환경부가 발행한 전국 폐기물 발생 및 처리 현황(2019년도)에 따르면 전체 폐기물 중 건설폐기물의 점유율은 44.5%에 달하며, 2014년과 비교하여 5년 동안 약 19.2%가 늘어났다.
[2] https://www.yna.co.kr/view/AKR20210914000400087
[3] https://youtu.be/aZxQ6tZEHc0
[4] https://youtu.be/Yl-Ih4wH9R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