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소설
혜원은 부산 시티 투어 버스 이층 중간 자리에 아이와 앉아 어깨 동무를 한 채 바깥을 바라봤다. 아이는 산과 바다가 번갈아 보이는 풍경이 뭐가 좋은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혜원의 감탄에 적당히 반응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혜원 역시 이 여행의 교육적 효과를 고민하느라 뺨에 스치는 나무 향이 나는 바람을 정작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두 칸 앞의 남편은 잠든 둘째 아이의 잔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 일정을 검색하느라 바빴다.
태종대 정거장에서 한 가족이 이층으로 올라왔다. 앞장 선 남자는 늘어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프라이탁 크로스백을 맨 평범한 중년이었다. 다음으로 남자 아이 둘이 탔다. 몸은 컸지만 얼굴이 아기 같은 것을 보니 십대 초반 쯤 되어보였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계단을 올랐다. 하늘색 깅엄체크가 가느다랗게 수놓아진 롱드레스를 입고 햐얀색 짧은 목양말과 잔꽃이 그려진 까만 스니커즈를 신은 날씬하고 아담한 그 여자는 눈에 띄게 청순했다. 혜원은 그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엄마와 다정하고 털털한 아빠, 그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자라난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이들이 만드는 평화를 마음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부러워했다.
스마트폰 게임을 시켜달라고 십 분에 한 번씩 말하는 아이의 칭얼거림과 여행 일정을 체크하기 위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불안한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작은 한숨을 쉬었다. 혜원에게 이번 여행의 역할은 분명했다.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봐야했고, 배워가는 것이 있어야 했다. 남편은 그 동안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쌓였던 피로를 단숨에 해소해야만 했다. 혜원은 이 모든 것을 기대하며 몇 주 동안 여행 계획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번이 오륙도 스카이워크야. 내릴 준비해. 놓고 내리는 것 없는지 잘 확인하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하차를 알렸다. “이번 기사님은 내리는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더라.” 남편의 말에 조급해진 혜원은 하차 신호를 긴장하며 기다렸다. “지금이야.” 남편의 사인에 혜원은 아이를 재촉하며 거의 뛰듯 이층버스 계단을 내려왔다. 뒤따라 남편이 잠에서 덜 깬 둘째를 어정쩡하게 안고 걸어 내려왔다. 축하라도 하듯 둥글게 서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혜원의 가족 뒤로 방금 그 가족이 예의 느긋한 모습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어머. 너 혹시 혜원이 아니니?” 청순한 그녀가 말했다. “정현 선배?” 부산 시티 버스에서 만난 청순한 그녀는 혜원의 대학 선배 정현이었다. 혜원의 학회 선배인 정현은 캠퍼스커플이었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로 도통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혜원은 정현과 함께 숨이 넘어가게 웃던 술자리,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며 총장실을 점거했던 사건, 이십년 전 함께 왔던 부산 여행을 빠르게 떠올렸다. 정현과 혜원은 밀면 식당을 한다는 호영을 따라 부산에 왔었다. 품이 큰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채 해운대의 짠물에 들어가 함께 뒹굴던 추억.
“선배. 아이들이 너무 의젓해요.” 정현은 아이들 눈치도 보지 않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얘네? 말 마. 내가 애들은 안데리고 다닌다 결심을 몇 번씩 하고서도 매번 속네. 아이고 힘들어.” 혜원은 웃음으로 답했다. “나는 아직도 세종에 살아.” 정현의 말을 듣고도 혜원은 정현에게 자기가 세종에 산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기억 나지 않았다. “선배 숙소 어디에요?” “해운대야.” 혜원의 숙소도 해운대였으나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을 피하고서 심심한 대화 한 두 마디를 더 나눴다. 그리고 혜원과 정현은 가족의 손을 잡고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흔 하나 혜원은 해운대 바다 어느 한 포말에 몸을 부딪히며 목청을 돋우어 웃고 있는 스무살의 혜원과 잠시 재회했다. 아이들이 소매를 잡아끌기 전까지. 아이들은 바다 위에 수놓인듯 아름다운 짙은 녹음의 바위섬 오륙도와는 반대 방향에 있는 에어컨이 빵빵한 편의점을 가리키며 졸라댔다. “그래 음료수 하나 마시자.” 두 아이는 그제서야 혜원의 옷깃을 잡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고 깔깔거리며 달려갔다. 혜원은 여행의 긴장을 조금 풀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들의 과자를 함께 골라주며 정수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축축한 땀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