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을
지나가는 길.
이웃의 강아지가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아이를 아는 체한다.
우리는 마을에 산다.
장소성으로도 시간성으로도 마을은 희귀해진 단어다.
젊은 시절 마을 만들기 기획자이자 활동가였던 나는
‘마을’이라는 정의의 희귀함 때문에.
(더구나 ‘+만들기’라는 불가능한 미션 때문에)
거의 나가떨어지다시피 일을 그만뒀다.
만일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이 범-장소적이고 범-시간적인 세계 속에서
나의 소울메이트를 찾아 헤매며 삶을 사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의 기쁨과 슬픔을 온전히 누리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겠다.-
하지만 정착할 곳이 필요한 그 순간 나에게 떠오른 것은 “마을”밖에는 없었다.
‘마을이 있는 곳에 살아야 해.’ ‘마을이 있는 곳에서 아이를 키워야 해.’
아이들은 본성과 오감을 모두 사용해 크는 것에 익숙하고,
어른들은 매일 친숙하지만 낯선 이곳을 맞닥뜨리며 산다.
- 행복을 조금 알 것 같다. 사람들이 왜 인문학을 그렇게 배우려고 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