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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현 Apr 28. 2023

두건을 벗은 엄마

이런 이유가 아니길 바랐다.

 넘치려는 눈물을 가슴속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채 엄마가 있다는 곳에 도착했다. 병원과 장례식장이 함께 붙어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큰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이 장례식장이 아니길 바랐다. 나는 병원과 장례식장 어느 곳에서 엄마를 만날까. “가자. 경현아” 큰아버지가 주차를 끝내고 나에게 말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듯이 큰아버지는 나의 발걸음을 장례식장으로 이끌었다. 

 

 지하로 내려갔다. 초여름의 날씨였지만 온몸으로 냉기가 느껴졌다. 복도 저 멀리 아버지가 서 계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생각보다 관찰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인물인 이유가 있다. 나 또한 그 복도를 걸어가면서 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믿으면서 걸어갔다. 나는 장례식장 건물 지하의 복도를 걷고 있고, 앞에는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만이 내 머릿속에 존재했다. 그리고 어느 방 앞에 서 있는 아버지 앞에 도착했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아버지는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계셨다. 아버지가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루도 쉴 날 없는 정치 생활을 하셨음에도 직접 엄마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셨고, 한국에서 쓸 수 있는 약, 할 수 있는 수술까지 다 하셨다. 우리나라에는 구할 수 없는 약을 찾기 위해서 해외를 찾아가서 약을 구해오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본인의 삶은 모두 지운 듯이 엄마만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온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나 또한 아버지를 쳐다볼 수도, 말을 건넬 수도 없었다. 내가 포옹 한 번 했더라면 아버지의 무너지고 있는 마음을 두 아들이 함께 버티고 있다고 전할 수 있었을까. 


 잠시 후 병원 관계자분으로 보이는 분이 문을 열었다. 분명히 모든 게 그대로였다. 아버지와 밥을 먹을 때 누워계신 던 엄마. 수박을 깎아 놓았으니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라고 했던 엄마.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던 엄마. 그대로였다. 아버지 등에 업혀 편하지 않는 자세로 뒷모습을 보였던 엄마가 아니라, 편안하게 누워있던 엄마 그대로였다. 어쩌면 내가 살아오면서 보았던 엄마의 모습 중 가장 편안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뀐 거라고는 엄마가 쓰고 계셨던 두건이 이제는 쓰여있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를 왜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깨닫기 어려울 정도였다.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물론 나는 엄마가 아프고 나서부터 그 기독교 집안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긴 했었다. 특히나 우리 엄마는 교회의 꽃꽂이도 하고, 헌금도 잘 내시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하나님을 위한 봉사라면 어떠한 궂은일이든 다 하셨다. 하나님한테만 잘한 게 아니고 동네 사람들, 내 친구들 모두 다 우리 엄마를 천사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삶을 사셨다. 그러한 삶을 산 사람에게 위암 말기라는 병을 안겨준다는 것을 어느 아들이 온전히 그것 또한 뜻이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린 나이에 나는 그러한 말을 성인군자처럼 받아들일 능력 또한 없었고, 그럴 마음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신에 대한 조금의 희망만을 가진채 살아가고 있었다.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 당신이 사랑한다는 딸을 왜 이렇게도 힘들게 하냐고. 당신을 위해서 살아온 우리 가족인데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데려가려고 하냐고. 우리들의 아버지라는 당신이 당신 생각만 하냐고. 인간인 우리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라는 당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치료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그렇게라도 내 마음을 풀어야 했다. 우리 엄마가 이런 이유로 두건을 벗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문을 열고 목사님이 들어오셨다. 임종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엄마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손은 엄마와 붙어있지만, 나의 시야는 깜깜했다. 더 이상은 내 눈으로 엄마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인정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시는지는 모르지만 목사님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부르심’, ‘천국’, ‘집사님’ 같은 단어들이 세상밖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하나 모두 다 거슬렸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기도인데, 나에게 그때의 기도는 내가 하나님과 완벽하게 헤어지기 시작한 기도였다. 화가 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나약함과 두려움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당신의 이기심에도.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뛰어갔다. 가슴속에 잘 눌러두었던 눈물을 세상밖으로 내보냈다. 나의 눈물샘을 틀어막을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찬란한 햇빛마저도 원망스러웠다. 어떠한 감정들이 섞여있는지도 모른 채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니까 혼자 있는 게 무서워졌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나 지금 장례식장이라고. 친구는 “그래”하고는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큰아버지가 옆에 오셨다. 아버지는 장례식을 준비하러 가셨다고 하셨다. 큰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내 옆에서 한 동안 서 계셨다. 더 이상은 나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자고 하셨다. 큰아버지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가는데 아까 전화를 했던 친구와 또 한 친구가 있었다. 그때 친구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양말도 신지 않고, 슬리퍼는 집안에서만 신는 슬리퍼 같은 것을 신고 있었다. 그리고 옷은 잠옷이라고 해도 못 믿을 정도로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입고 온 것만 같았다. 머리는 감지도 못하고 새집이 지어져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줬다. 아니 내가 그들에게 아무 말 없이 안긴 게 맞는 것 같다.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보내주는 토닥임이 나를 구원해주고 있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신은 내 앞에 있었다. “나 옷 갈아입고 와야 된대”라고 했더니 친구는 동문서답을 했다. “지금 다른 애들도 오고 있대.” 나 또한 동문서답을 했다. “갔다 올게”. 이어지지도 않는 대화를 나누었지만 우리들은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큰아버지 차의 조수석에 다시 탔다. 그리고는 다시 출발했다. 엄마가 깎아준 수박이 있는 곳으로. 엄마와 아버지를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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