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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현 Apr 30. 2023

내게 맞는 상복이 있었을까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라는 말을 거짓말로 사용하고 있다

 나의 마음이 옷에까지 물이 들었는지 나는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다. 이 마음을 며칠 동안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큰아버지는 내 옷장에서 어두운 색의 옷을 꺼내주셨다. 나는 상처로 찢어진 피가 아닌, 이제는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는 듯이 단단한 어둠으로 감싸였다. 옷이 누군가의 마음과 상황을 표현해 봤자 얼마나 표현할 수 있다고 나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돌아오고 가는 길에 버려야 했던 걸까.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에 나 또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나도 어른스럽지 못하게 “저 친구네서 자고 가도 돼요?”라고 질문했던 내가 고작 몇 시간 전부터 어른이 되어있어야 했었나. 


 다시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이 순간부터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를 보낼 때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자세히는 남아 있지 않다. 3일 간 몇 가지의 장면들만 내 머릿속에 단편영화처럼 찍혀있다. 정말 답답하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기억을 끄집어 내려해도 나지 않는다. 나는 사실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지금도 그렇고. 몇 주 후의 계획들도 한 번 머리에 들어오면 잊지 않기 때문에 따로 메로를 해놓을 필요도 없을 정도다. 공부할 때도 교재를 통째로 다 외워버리는 대도 어려움이 없었고, 대본을 외우는데 암기력 때문에 걱정을 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기억력에는 문제를 삼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대본을 어떻게 그렇게 잘 외우냐고, 방법이 있냐고 동료들이 묻는 편이다. 그런데 그때의 3일은 중간중간 누가 영상의 부분들을 편집에서 삭제한 것처럼 기억이 없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길에 버리면서 옷을 갈아입고 왔는데, 나보고 또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대여를 해주는 상복이다. 나에게 그 옷은 컸다. 이제는 옷이 누군가의 마음과 상황을 잘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내 몸과 이 옷이 정확히 표현해주고 있었다. 그 어느 한 곳 제대로 내 몸과 맞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장례식이 끝나면 상복이 내 몸에 딱 맞았을까. 그 누구도 자신에 딱 맞는 상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라는 말을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사용하고 있다.


 옷을 입고 웃고 있는 엄마 옆에 앉아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나는 엄마 옆에 있는데 엄마는 내 옆에 없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한마디 말도 섞은 기억이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사람들이 하나 둘 엄마와 작별인사를 하는 모습이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버지와 나에게도 뜻 모를 인사를 했다. 나에게 한 마디씩 해주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내 마음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싫었다. 물론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해주신 말인지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때의 나였다.


 바닷가에서 방문하는 파도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차가운 돌의 마음에 품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엄마”하는 소리가 우리 식장 신발장 쪽에서 들렸다. 형이 군복을 입고, 한 손에 무엇을 들고 뛰어들어왔다. 그리고는 웃으며 맞아주는 엄마의 마음은 알아보지도 못한 채, 엎드려서 속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내가 큰아버지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동안 참아왔던 그 눈물을 형 또한 부대에서 이곳에 오는 길 동안 꾹꾹 참아 왔을 거다. 그리고는 이제 더 이상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형이 한 손에 들고 온 것은 엄마에게는 쓴 편지였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편지에 대해서 형에게 들었다. 평소에는 일과가 끝나고 엄마와 전화 통화를 자주 했었는데, 장례식 며칠 전에 문득 엄마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서 썼었다고 했다. 그리고 휴가 때 직접 전달해드고 싶어서 부치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고. 결국엔 부치치 못한 편지가 되었던 거다. 그렇게 엎드려 엄마에게 부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형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만 봤다. 아버지, 형, 나 모두 한 자리에 모이니 이제야 정말로 현실에 한 발 제대로 발을 디딘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 네 가족은 모였다.


 계속해서 엄마, 아버지의 지인들. 형과 내 지인들. 그리고 친척들의 지인들. 많은 사람들이 엄마가 가시는 길을 함께 해주셨다. 며칠째 인지도, 몇 시 인지도 모르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염을 하러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염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아버지, 형, 나, 큰아버지 가족과 고모네 가족과 목사님이 함께 내려갔다. 이제 엄마를 화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를 깨끗하게 닦아주는 일이라고 했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딘가로 내려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엄마인데, 도저히 볼 수 있는 용기가 안 생겼다. 그래서 따라가면서도 나는 엄마를 못 보겠다고 위에 있겠다고 수 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게 엄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라며 힘들어도 가자고 했다. 아들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해주는 것을 엄마가 바랄 거라고. 지금껏 내가 엄마가 바라는 대로 했던 것이 있었을까. 엄마가 바라는 아들로 살고 있었을까. 아니, 엄마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나 있었을까. 정말 못된 아들이 이제야 엄마를 위한 행동을 하기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끝까지 나만 생각했던 못된 아들이 끝까지 나만 생각했던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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