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이전에 거쳐야 할 과정
용서라는 단어를 들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도 아프고 씻어내지 못할 상처를 안겨준 사람들. 평생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름들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3년 전 큰 충격을 받게 한 남자까지. 나는 왜 아직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내게 사과조차도 하지 않은 그들을 꼭 용서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이전에 나도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는 않을까.
1. 마음을 열지 못하게
어릴 때부터 소극적이었던 나는 아니었다. 유치원 때 또래들보다 키가 컸던 나는 활발하게 나서기도 하고 남자아이들을 항상 이끌고 다닐 만큼 밝은 아이, 리더십 있는 적극적인 아이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이후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이 힘들고 버거운 일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게 되었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일상을 함께 나누고 감정을 전해주는 친구들에게만 마음을 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말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고, 1년에 한 두 명 정도 친해지는 게 좋았다.
중학교를 입학한 후, 초등학교 때 아람단과 합창단을 같이 했던 언니가 3학년 선배로 재학 중이어서 인사를 종종 하기도 하고, 다른 신입생들보다 나를 잘 챙겨주는 언니가 고마워서 늘 밝은 모습으로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1학년 일진이라는 무리가 나를 운동장 구석진 곳으로 불렀던 날이 있었다. 다른 한 친구가 내가 버스에서 언니를 욕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절대 그럴 리가 없어서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한 후 집에 돌아갔고, 나중에 알고 보니 3학년 일진 언니와 친한 나이기에 1학년 일진들과도 내가 친해질까 봐 헛소문을 퍼트린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3학년 언니에게도 괜히 오해를 받게 해서 미안한 마음에 편지를 구구절절 써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 이후로 언니와 나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다. 가까이에 있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걸 어린 나이에 몇 번이나 경험했다. 당시에는 헛소문을 퍼트린 그 친구가 원망스럽긴 했지만, 지금까지 용서를 못 하고 있는 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에 다가왔던 상처들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2.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2000년 중1 때 '스카이러브'라는 채팅 사이트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상처를 많이 받았기에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전혀 흥미가 없었던 나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장난 삼아 고등학생들을 만나기도 하고, 당일에 그들의 자취방에 찾아가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가서 노는데 시간을 쏟았다. 나도 가보기 전까지는 이런 상황을 전혀 몰랐다. 자주 가던 친구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못 간다고 해서 내게 오늘 하루만 와달라고 부탁을 하길래 몇 번이나 뿌리쳤지만 계속 붙잡히는 게 귀찮아서 딱 한 번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엄청 충격적인 현장이었다. 담배연기로 뿌옇게 뒤덮인 공고생들의 자취방이라니... 이미 소주를 몇 잔씩 들이키고 있던 그들은 이제 막 초등학생의 옷을 던지고 교복을 입은 우리들에게 소주를 계속 권했고, 교복 치마 위에 손을 슬그머니 올려놓기 시작했다.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스킨십을 계속 시도하는데 우리가 취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든 취하지 말자고 약속했던 친구들이기에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다. 그들은 애가 탔는지 장소를 자취방에서 노래방으로 이동했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친구들을 뒤로하고 도망갈 기회를 찾다가 잽싸게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친구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현장에서 느꼈던 불안감과 두려움, 공포심은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마치 영화 <한공주>에 나온 한 장면처럼.
중2 때는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이 걸려서 일주일간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수술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척추에 엄청 커다란 주사를 꽂아 무언가를 자꾸 뽑아냈고, 매일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 그 기간이 학교 수련회 기간과 맞물렸고, 병실에 찾아오는 친구들이 없어서 외로웠던 시간이었지만 가끔씩 가족들이 찾아올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친구 할머니네 시골집을 가게 된 날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역시나 당황스러운 일들이 있었다. 뇌수막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던 수련회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던 20대 초반의 교관들이 시골에 찾아왔다. 중2인 우리들과 소주를 밤새 마신 날. 처음으로 술을 마셔보기도 했고, 그렇게 많은 양의 소주를 밤새 다 마셔본 적은 없을 것이다. 교관들이 우리보다 더 일찍 취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 교관들 주위에 또래 대학생들도 충분히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중학생인 우리를 보러 시골까지 찾아와서 밤새 술을 마셨던 걸까. 아마 그때부터 남자에 대한 경계심을 더 크게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3. 사랑, 그게 뭔데
20대가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과만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사람들과 두루두루 지내긴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은 한없이 높았고, 속마음은 항상 경계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가오는 이성이 하나 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 역시 경계했지만,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조금씩 내 마음도 열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내 마음이 점점 커져가면서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갔지만 상대는 금방 식어가거나 알고 보니 이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던 남자, 스킨십만 하려는 남자 혹은 바람둥이였던 경우가 다수이다. 소개팅을 해도 상대가 너무 집착을 하거나, 언행이 무례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서 이제는 소개팅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런 날들이 점점 쌓여가고 상처가 깊어지면서 ‘연애와 결혼 따위는 내 삶과 무관하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하고 마음 문을 아예 닫아버린 경우가 많다. 가끔 현실적인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깨달을 때도 있지만,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이 세상에는 나를 정말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만 되묻는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기에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을 모를 수도 있는 것이고.
4.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내 안에 상처가 많다는 것을 요즘 글을 쓰면서 더 느끼고 있다. 이런 나를 언제쯤이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게 궁금했다. 평생 숙제라고만 생각되었던 나를 사랑하기. 그런데 어제 북클럽을 다녀온 후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나를 용서하는 것. 타인을 용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자주 해봤지만,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나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니, 내 아픔을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니... 나는 항상 정의로운 사람이길 원했고 타인 앞에서 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만 보이길 원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를 계속 자책하고 꾸짖으며 혹독하게 대했다. 그런 시간들 속에서 며칠 동안 괴로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하고, 입맛이 없을 때도 많았다. 타인에게는 사과도 잘하고 용서하려는 마음도 가지면서 내게는 왜 용서의 기회조차 주지 않았을까.
사람은 누구나 다 아프다고 한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각자에게 주어진 힘든 시간들을 이겨내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한다. 나는 그런 힘든 모습은 무조건 감춰야 하고,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면서 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이 훨씬 더 아픔이 많아 포장하려고 해서 언젠가는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 날이 오거나 완전 무너져서 슬럼프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 자신을 존중해주고 용서해줄 수 있어야 한다. 힘들면 무너지기도 하고, 자신이 와르르 깨지는 순간들을 통해 약할 때 그 약함을 표현하고 인정하는 것이 진짜 강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강함을 지금까지 몰랐던 나, 스스로의 아픔을 회피하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마음도 조금씩 생기지 않을까 싶다.
브런치가 내게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다. 내 감정과 함께 낯설었던 내 모습을 알게 되고, 하루를 정리하게 되고, 과거를 떠올리며 내 아픔을 끄집어 내게 되다니. 그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하나 정리해보면서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나를 여전히 믿어주는 이들이 참 많지만 그렇지 않을지라도 내가 스스로를 믿어주고 인정하고 사랑하기. 마음에 내키지 않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땐 스스로를 용서해주는 법도 배우기. 인생 숙제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내 변화가 기대되는 숙제들이라 설렌다.
참 힘들었지, 지금까지 잘 이겨내 줘서 고마워.
언제나 널 응원하고 사랑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