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다, 사랑한다
살다 보면 지나간 일들로 인해 후회를 많이 하기도 하고 여전히 풀리지 않은 서운함이 남아 있기도 한다. 내가 선택해서 일어난 어려운 일들과 어긋난 인간관계, 그리고 뜻하지 않게 일어난 복잡한 문제들. 전부 다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고 행복한 순간들만 간직하고 싶었다. 내 인생영화 중 하나인 <이터널 선샤인>에서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을 지우려고 했던 짐 캐리(조엘 역)와 케이트 윈슬렛(클레멘타인 역)처럼. 그래서 좋지 않은 사건들, 아픔을 준 사람들은 애써 부정하고 내 삶에서 멀리 떼어내려 했다. 당연히 영화 속 이야기처럼 기억은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
1. 증오와 공포의 대상
어릴 때부터 증오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함께 하지 않는 아빠라는 존재.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거나 동생과 말싸움할 때, 컴퓨터 게임할 때, 그 외에도 갑자기 화가 나면 다혈질인 아빠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으로 날 마구 때렸다. 회초리로 시작했지만 나무 몽둥이, 허리띠, 손찌검, 심지어 내 유치원 졸업 액자를 바닥에 깨트린 날도 있었다. 학창 시절에 문제를 일으킨 적도 거의 없고, 게임을 좋아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내신성적도 잘 유지하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3남매 중 장녀라는 이유로 자주 맞았다. 동생과 가끔 얘기할 때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장녀, 장남으로 태어나면 아빠의 모든 화를 전부 받아줘야 하고 이유 없이 맞아야 하는 존재인가?
밖에서는 순하고 착한 양의 탈을 쓴 아빠가 집에만 오면 괴물처럼 변하는 모습이 무서웠다. 어른들이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착한 아빠가 너희 아빠라서 정말 좋겠다.”라는 얘기를 종종 했는데 정말 듣기 싫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의 아빠도 모두 비슷한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중학교 때 친한 친구는 아빠와 제일 친하며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심지어 매일 뽀뽀도 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이었다. 내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 날 이후 아빠가 하는 모든 게 다 싫었다. 거실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끊임없이 담배만 피우는 모습, 밥 먹을 때 소주가 없으면 큰소리치는 모습, 그러다 화가 나면 밥상을 엎어버리는 모습, 게다가 매일 똑같은 곡만 연주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던 나였지만 아빠가 연주하는 기타와 하모니카를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욱하면 나를 때리기만 하는 그 다혈질이 싫어서 타인에게 내 감정을 전혀 보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늘 화내지 않고 참으려고만 하는 모습,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유도 아마 그 영향이 클 것이다. 고등학교 때 아빠와 부딪힌 사건으로 남자 공포증까지 생겼다. 이른 아침부터 조용히 눈물을 흘린 그 날, 그때의 감정은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사춘기라서 조금 더 예민할 수 있었겠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왠지 모든 남자가 아빠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았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쳐다보면 소름 끼칠 정도로 싫었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 남자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기에 6년 동안 남자에 대한 두려운 마음들이 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2. 왜 태어났니
나는 왜 계속 맞고만 있는 걸까, 아빠는 날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부모님은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걸까. 계속 반복되는 상황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가지고 끙끙 앓으며 슬퍼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섯 명의 가족이 차를 타고 집에 가던 어느 날이었다. 여동생과 사소한 말다툼이 일어났는데 운전하고 있던 아빠가 갑자기 화가 나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다 같이 죽자고 했다. 조수석에 있던 엄마가 몇 번이나 말려서 집까지 겨우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중2였던 나는 15살, 초등학생인 둘째는 11살, 막내는 아무것도 모르던 4살. 아빠와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무서웠고, 그 순간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죽고 싶어서 코로 숨을 쉬지 않으려 했고, 구석으로 몸을 돌려 목을 스스로 조르면서 죽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는지 모른다. 넓은 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관광버스를 향해 달려가기도 해 보고, 수십 개의 알약을 먹고 죽으려고도 해봤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으려 한 적도 많았고, 유리조각에 찔려 과다출혈로 죽고 싶어서 아빠가 나를 향해 던진 졸업 액자를 지근지근 밟기도 했다. 아빠를 죽일 수 없으면 내가 사라져 주겠다, 죽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내 목숨을 쉽게 빼앗아 갈 순 없었다.
3. 원하는 대로
고3 때부터 그토록 소원이었던 가족들과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모두 서울로 다시 이사를 갔는데, 동생들처럼 나도 서울로 전학을 가서 적응 후 인 서울 대학을 쓸 수도 있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땐 고3이라는 그 시간이 뭔가 두렵고 서울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냈던 시간이 나를 살릴 수 있었던 시간인 것 같다. 영화관을 자주 찾아가기 시작한 때도 바로 그 해, 2005년부터였다.
대학교 역시 사범대를 가기 위해 가까운 지방대를 선택하게 되었고 광주에서 계속 지내기로 했다. 수능 성적에 맞춰 유명한 학교의 관심 없는 전공을 선택하기보다는, 누가 알아주지 않는 학교라도 흥미 있는 전공을 하기 위해서 지방대를 선택했다. 그때 이모들이나 외할머니에게 많은 핀잔을 들었다. 남들은 다들 가려고 애쓰는 대학에 붙었는데도 가지 않는 나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과 오가는 말들이 싫었지만,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인생이기에 원하는 대로 하고 싶었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더욱 소신 있게 행동했던 것 같다.
그렇게 컴퓨터교육과와 음악교육 성악 전공, 피아노 부전공을 7년 동안 잘 마치고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졸업장과 함께 중등 교원자격증 두 개를 취득해서 왔지만, 앞으로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 교사를 포기하겠다는 말에 엄마가 나 몰래 몇 번이나 우셨다는 얘기를 나중에서야 들었다. 엄마가 이루지 못 한 교사라는 꿈, 교장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엄마에게 꼭 이뤘음 하셨던 그 교사라는 꿈을 나는 과감히 접었다. 음악 교생실습 때 학생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함께 어울리는 시간은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체감했고, 그 이후로 여러 교육학 강의들을 통해 앞으로 꿈꾸는 교사의 모습이나 사명감이 내게 없음을 알게 되어 교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전공도 직업도 원하는 것을 선택하려 했던 내 모습, 칭찬해주고 싶다.
4. 핑크빛은 아니더라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엔 내면이 온통 회색빛인 내 모습이었다면, 대학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어릴 적 밝은 내 모습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동기들과 선배들 또한 친절하고 편하게 다가와줘서 남자 공포증도 사라졌다. 입학한 지 한 달도 안되어서 고백도 받아보고,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선물 공세와 편지도 받고, 나를 너무 챙겨줘서 부담이 되는 사람까지 생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에 나도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게 됐는데, 혹시나 상처 받을까 봐 겉으로는 표현을 못 하고 속으로만 좋아하면서 사람을 6개월에서 1년 정도 오래 지켜보려는 습관도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
3년 동안 좋아한 친구에게 로즈데이날 장미꽃과 편지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7개월 동안 친하게 지냈던 동생에게 술김에 새벽에 문자로 장난처럼 고백한 적도 있었고, 10개월간 좋아했던 마음을 고백할 때 한 시간 동안 걸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내 생애 딱 세 번 고백했던 순간들. 결과는 모두 실패였지만 이들에게 전했던 내 마음은 모두 진심이고 간절했기에 후회는 없는 것 같다. 차인 직후 에는 당연히 힘들었고, 기억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용기 있는 모습이다. 상대를 너무 길게 바라보거나 혼자 끙끙 앓는 시간들도 앞으로는 줄어들겠지. 글쎄, 이번 생애 다시 고백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연애나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귀를 닫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사건들 또한 많았다. 왜 이런 사람들만 계속 만나나 싶을 정도로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는 원망이나 상대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앞으로도 계속 만날 일이 생겨서 절대 피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내가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 쳐봤자 내 힘만으로는 결코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 받은 상처로 마음의 벽을 높이면 어딘가에 있을 좋은 사람을 놓칠 수도 있을 테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을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경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살고 있는 현실이 꿈꾸는 환상처럼 핑크빛 하늘, 핑크빛 사랑은 아닐지라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자리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잘 살아가는 것. 다양한 색깔을 경험하며 나를 알아가는 것이 요즘 너무나 좋다.
아픔과 고통이 없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봤다. 하지만 요즘 깨닫는 것은 인생은 결코 1분 1초가 헛되지 않고, 모두 의미 있는 순간들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결국은 그 시간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느끼고 아프기도 하면서 내 모습을 찾아 변화되고 있다는 것. 숱한 고난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고, 아픔 가운데 지극히 평범했던 삶은 감사였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모양은 모두 다르기에 고난의 크기 또한 다를 수 있겠지. 그래도 누구나 다 아프고 슬프고 힘들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자. 지금까지 많이 아파했던 나를 토닥여주며 안아주기도 해야지.
미안하다, 장세아.
사랑한다, 장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