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첫눈, 낭만을 잃어버린 겨울

겨울잠에 빠져버린 토끼처럼

by 장세아

첫눈이 내린다. 11월에 잠깐 내렸다고는 하지만 오늘 본 첫눈이야말로 겨울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창문을 열어 첫눈 구경을 하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참 해맑은 얼굴이다. 첫눈이 와서 좋아했던 기억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하다. 강아지 솔이와 귀여운 조카는 엄청 좋아할 것 같지만 수족냉증이 심하고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눈이 오면 걱정부터 된다.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울까, 핫팩은 얼마나 더 사야 할까, 야외 촬영이 잡히면 어떻게 버틸까. 하얗고 순수했던 그 마음, 내 낭만은 어디로 도망간 거니.




1. White Love (스키장에서)

첫눈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다가 갑자기 스키장에서 첫눈에 반했던 사람이 생각났다. 사람을 오래 보면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나인데, 2006년 스무 살의 겨울은 참 풋풋하고 싱그러운 내 모습이었다.


교양 과목 중 하나인 '현대 사회와 레크레이션'의 스키 강습을 듣기 위해 친구들과 3박 4일간 스키장에서 함께 했다. 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했기에 좁은 공간에서 모두 쪼그려 앉아 강사님의 설명을 듣게 되었다. 처음엔 집중하지 않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에서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귓가에는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배우 '강동원'이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봤는데 ,

(Oooooooooh My God!!!!!!!!!!!!!!!!!!)

영화 <늑대의 유혹>의 정태성이 눈앞에 서 있었고, 실내이지만 그는 우산을 들었다가 눈이 스르륵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내게 우상과도 같은 강동원 선배님을 닮은 스키강사로 인해 여학생들이 난리가 난 것이다. 내 마음에 한 줄기의 빛이 아주 환하게 비춘 것만 같은 느낌.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처음으로 느껴본 순간이었다. 마음이 하얀 눈처럼 새하얗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영화 <늑대의 유혹>, 2004

그 이후 며칠간 그 강사분을 쳐다만 보다가 마지막 날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엄청 애썼다. 받았는지 기억은 잘 나진 않고, 싸이월드 일촌을 맺으며 네이트온 메신저로 몇 개월간 연락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만난 적은 전혀 없었지만 쪽지만 주고받는 걸로도 마음이 콩닥콩닥 했던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많이 닮은 것 같지도 않은데 첫눈에 반할 정도로 마음이 녹아내린 그 순간이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 스무살이어서 가능했던 이야기겠지.



2. 첫눈 오는 날

첫눈이 오면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첫눈 맞으면서 몇 시간씩 걷기, 영화관에서 겨울 배경인 영화보기,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 타기, 재즈가 흘러나오는 카페나 재즈바에 앉아서 따뜻한 음료와 함께 첫눈 구경하기 등등... 누군가와 함께 했더라면 더 좋을 일이지만 첫눈 오는 날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서 몇 시간 동안 걷기도 해 보고, 겨울 배경의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갔지만 내가 그려왔던 장면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던 것 같다.


첫눈은 이제 큰 감동이 없다. 누군가가 곁에 없어서도 아니고, 혼자 충분히 즐기지 못해서도 아니다. 차디찬 현실을 깨달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그저 추운 날씨를 피해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체력을 보충하느라 시간을 많이 쏟는 것 같다. 첫눈에 대한 특별한 감정도 낭만도 사라진 지 오래된 것 같다.


제이워크의 ‘첫눈 오는 날’이라는 곡이 문득 떠올랐다. 첫눈 오는 날 꼭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그 다짐이 떠올라 플레이리스트에 담았다. 이 노래가 마치 내 고백처럼 다가오던 그 날이 있었는데 이제는 설렘조차 생기질 않는구나. 물론 달달한 목소리는 여전히 듣기 좋지만... 낭만을 잃어버린 2019년의 겨울은 참 쌀쌀하다.


하얀 눈이 아니야 널 위한 내 마음이야
아무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널 위해
봄 여름 가을을 기다려 왔잖아
하얗게 쌓인 내 맘이 내려올 거야

첨엔 사랑인 줄 모르고
내 맘 왜 이런 줄 모르고
너무 늦게 왔잖아 첫눈처럼

I'm loving you snow on you
너만을 위한 거야 아이처럼 좋아하는
널 보며 나도 웃어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축복하듯 눈이 내려와
나 약속할게 영원히 너 하나만 사랑할게

많은 사람 중에 너만 보이잖아
이 겨울 찬바람마저 설레게 해

첨엔 사랑인 줄 모르고
내 맘 왜 이런 줄 모르고
너무 늦게 왔잖아 첫눈처럼

I'm loving you snow on you
너만을 위한 거야 아이처럼 좋아하는
널 보며 나도 웃어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축복하듯 눈이 내려와
나 약속할게 영원히 너 하나만 사랑할게

혹시 들리지 않니 너를 향한
가슴 벅찬 내 심장소리가 세상에 퍼지는데

I love and I need you
I love and I need you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축복하듯 눈이 내려와
나 약속할게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줄게

I 'm loving you snow on you
너만을 위한 거야 아이처럼 좋아하는
널 보며 나도 웃어 우리의 사랑을
세상이 축복하듯 눈이 내려와
나 약속할게 영원히 너 하나만 사랑할게


♪ 제이워크 - 첫눈 오는 날



3. 거울같은 영화들

영화 두 편을 봤다. <러브 앳> 그리고 <허슬러>. 요즘 너무 피곤해서 영화를 예매했다가도 금방 취소한 후 집에서 자는 일이 반복됐는데, 첫눈 오는 날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겨서 가까운 영화관을 찾았다.


두 영화 중 내 마음에 쏙 들어온 영화 <러브 앳>.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좋아하는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 <이프 온리>, <어바웃 타임>을 떠오르게 했다. 배우와 음악과 연출의 조합이 전부 좋았고, 클래식을 싫어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전부 배우고 싶을 정도로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매번 타이밍이 엇갈려 후회가 많았던 나. 하지만 모든 것을 뛰어넘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도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영화는 현실과 다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일까? 수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돌아왔지만, 현실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아프고 시린 날들이 많았기에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래도 영화가 너무 좋았던지라 올해 가기 전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영화 <러브 앳> Love at Second Sight, 2019


<허슬러>도 나쁘진 않았지만 마음을 무겁게 하면서 사회적 문제들을 계속 곱씹어 보게 했던 영화. 초반에는 당황스러운 장면들도 많았지만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편견을 갖고 바라보았던 시선들도 느끼게 되었다. 작은 행동으로 미리 추측하고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마음. 물론 감독님의 의도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 고민했던 문제가 영화 속에서 보여서 깜짝 놀랐다.


영화를 보면 내 모습을 알게 되어 참 좋다. 솔직한 내 감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작품 속의 캐릭터에서 내가 낯설어하는 내 모습이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올 때. 처음에는 당황스럽지만 그렇게 알게 된 내 모습을 곰곰이 떠올리게 되어서 좋은 시간인 것 같다.


영화 <허슬러> Hustlers, 2019



새하얀 웃음이 그리워, 마음이 그리워.

잃어버린 순수함, 그 낭만을 찾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