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y Jan 21. 2022

계리에 대한 비판(Critique of Actuary)

계리는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면 우선 그것을 비판(Critique)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비판한다는 말은 우리가 평소에 쓰는 비판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다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the 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사용한 비판이며, 칸트는 이 단어를 '한계를 규명한다'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니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의 순수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한계를 규명한 책이다. 인간 이성에 대해서 가장 많은 고민을 한 사람이 남긴 책이 그것을 비판하기 위한 책이었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것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게 안다는 것의 의미이다.


어떤 개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때 누가 그것을 더 신앙처럼 받아들일까. 더 많이 아는 사람, 우리가 하나의 영역에 대해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깊이 그것을 믿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이 가진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한다. 그러니,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안된다는 점을 밝힌다. 세상에는 마치 자연에 이미 존재했고, 인간이 그것을 멋지게 체계화한 것과 같은 개념이 많다. 하지만 아마 그 어떤 것도 만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없다. 누군가 어떤 개념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간단명료하게,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둘 중에 하나이다. 사기꾼이거나, 잘 모르는 사람이거나.


그러니 무엇인가를 사용하고 싶다면 우선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대개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들은 가까이 가서 보면 단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멀리서만 봐서 단점을 보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장점도, 단점도 모두 알려는 태도가 우리에게 더 이롭다. 가까이 가야 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은 할 수 없는지, 그리고 그 단점을 보완하려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계리나 통계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불확실성을 다루는 이들 개념에서는 정확히 인식한다는 것의 중요성이 다른 무엇보다도 커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리나 통계적 방법론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한계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칸트는 그 한계를 규명하기 위해 인간의 사고를 끊임없이 체계화하고 분석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그의 책으로 남겼다. 하지만 계리적 방법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계리적 방법론은 인간 이성처럼 설계자가 누군지, 어떻게 만들어 낸 체계인지 아무도 모르는 세계가 아니다. 계리적 방법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체계이다. 그러니, 우리가 계리적 방법론을 만들어 낼 때 어떤 고민을 했는지 짚어보는 것으로 그 한계를 규명할 수 있다.


계리적 방법론이 하는 일은 데이터를 사용해 미래 예상되는 보험의 현금흐름을 추정하는 것이다. 주어진 과거 데이터가 있고, 그 데이터를 사용해 보험 계약에서 앞으로 어느 정도의 보험금이 지출될지 추정한다. 그러면 계리적 방법론을 통해 우리가 하고 싶었던 목표, 받아야 하는 '보험료'를 결정할 수 있다. 물론 비슷한 논리로 남겨야 하는 '준비금'도 결정할 수 있다. 결국 계리에는 데이터가 있고 방법론이 있다. 그리고 계리의 한계를 결정하는 것은 '데이터'이다.


데이터가 계리적 방법론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데이터에서 같은 연령, 성별을 가진 사람들 100만 명 중 100명이 어떤 병에 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리적 방법론은 그들의 연령, 성으로 구분된 단위에 질병이 발생할 확률이 1/10000이라는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추세, 새로운 의료 기술의 개발 등으로 세상이 바뀌는 일은 계리적 방법론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한다. 그런 요인은 우선 배제한다면 100만 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결과는 그 자체를 믿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나름 비슷하게 생긴 100개의 건물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100개의 건물 중에 5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리고 계리적 방법론은 이번에도 동일하게 5/100의 확률로 사고가 발생한다는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는 5/100이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라고 말할 수 없다. 100개는 무엇인가를 추정하기에 충분한 숫자가 아니다. 심지어 그 100개의 건물이 만들어진 연도, 내부 소방 시설, 건축 재료, 마감재와 같은 중요한 세부 사항에서 모두 동일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면 그 의미는 더욱 흐려진다. 물론 계리적 방법론이 보여주는 결과가 틀린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틀린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 결과를 해석하는 사람일 것이다.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더라도 아까와 같은 데이터 하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미와 이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아까는 기댓값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기댓값을 기대할 수 없다. 데이터의 부재는 추정의 불확실성을 키우며,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고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더한다.


분명히 과거 데이터를 사용해서 얻은 결과에는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 과거 10년 동안 발생한 평균 손해율이 80%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 계약을 80% 정도의 손해율이 발생하는 계약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사실이 우리에게 내년에도 그 계약이 80%의 손해율을 기록할 것이라는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80%라는 결과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경계를 제대로 아는 것이 재보험 계리가 다른 계리적 방법론과 달리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보험의 분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