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한겨울의 바다가 널뛰는 불꽃을 안아줄 때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내 입에서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저 그가 사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너무 많이 녹아 있었다는 것, 혹은 그가 무심코 던진 농담의 타이밍이 어긋났다는 것. 평소 같으면 웃어넘길 일들이 요즈음의 나에게는 시한폭탄의 뇌관처럼 작동한다.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그저 조용하고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변명도, 반박도 하지 않는 그 특유의 침착함. 평소에는 그 고요함이 좋았지만,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날에는 그마저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나는 본래 예민하게 타오르는 촛불 같다가도, 한순간 용광로처럼 뜨거워지는 성정을 가졌다. 내 안의 열기는 나를 치열하게 살게 한 원동력이었지만, 최근 들어 이 불길은 통제권을 잃었다. 시도 때도 없이 얼굴로 열이 달아오르고, 한밤중에는 식은땀에 젖어 잠에서 깬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의 진폭이 미친 듯이 널뛴다.
의사는 그것을 '여성호르몬의 감소'라는 건조한 의학 용어로 설명했지만, 내가 체감하는 단어는 달랐다. '상실'.
그는 나보다 한참 어리다. 한겨울의 바다처럼 깊고 서늘하며, 때로는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차분한 사람. 우리는 불과 물처럼 달랐지만, 역설적으로 그 다름 때문에 강렬하게 끌렸다. 나의 뜨거움은 그의 서늘함을 데웠고, 그의 깊은 바다는 나의 위태로운 불꽃을 안정시켰다. 나는 그에게 언제나 성숙하고, 여유로우며, 매력적인 '어른 여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요즈음의 나는 그저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늙어가는 여자일 뿐인 것 같았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멍하니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날이 늘었다. 눈가의 주름, 어딘가 푸석해진 피부. 생물학적 시계가 멈춰간다는 사실은 단순히 몸의 변화로 끝나지 않았다.
'이 젊고 빛나는 남자가, 더 이상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잃어가는 나를 계속 사랑할까?'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짜증의 기저에는, 사실 이 지독한 불안과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었다. 내가 화를 냈던 건 녹아버린 얼음 때문이 아니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에서 행여나 '지루함'이나 '의무감'을 발견하게 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방어막을 쳤던 것이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라도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의 크기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유치하고 옹졸한 발악.
어느 밤, 이유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파에 웅크려 있을 때였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곁에 앉았다. 왜 우냐고 묻지도,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서늘하고 커다란 손으로 열이 오른 내 뒷목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온도가 또 제멋대로네."
낮고 차분한 목소리. 그는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고는, 내 손을 꽉 쥐었다.
"힘들면 화내. 다 받아줄 테니까. 대신, 혼자 숨어서 울지만 마."
그의 방식이었다. 거센 불길을 억지로 끄려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넓고 깊은 바다 한가운데로 나의 불꽃을 기꺼이 품어주는 것. 나는 그 서늘하고도 다정한 온도에 기대어,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내가 더 이상 여자가 아니게 될까 봐 무섭다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비참한 고백들이 눈물에 녹아 흘러내렸다.
여전히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욱하고, 그는 그런 나를 가만히 안아준다. 나의 갱년기는 진행형이고, 우리의 다름은 여전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여성호르몬 수치가 나의 매력을 전부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그의 깊은 바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게 나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내 여친은 갱년기라고, 속으로 한숨을 쉴지도 모를 나의 연하 애인. 이 널뛰는 계절을 건너는 동안, 나는 조금 더 뻔뻔하게 그의 바다에 나의 열기를 식혀볼 참이다. 불안함 대신, 나를 온전히 내어놓는 법을 배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