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신드롬 소믈리에 Ep. 9]

by 린나이

운명은 신문지 귀퉁이에 있지 않습니다.

부제: 내일이 기대되지 않아 '오늘의 운세'를 도핑하는 60대에게


(딸랑-. 문이 열리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은은한 스킨로션 향이 섞여 들어온다. 단정한 등산복 차림의 60대 남성 손님. 자리에 앉자마자 품에서 꼬깃꼬깃하게 오려낸 신문 조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정갈하고 차분한 인상을 가진 분이 오셨군요. 그런데 손님, 눈빛만은 마치 복권 추첨을 기다리는 소년처럼 초조해 보입니다. 손에 쥔 그 종잇조각이 당신의 오늘을 결정하는 지도라도 되는 모양이군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 양반, 이거 좀 봐주게. 오늘 내 운세가 '동쪽에서 귀인을 만난다'였어. 그래서 내가 아침부터 도서관 가는 길을 놔두고, 굳이 동쪽으로 30분을 돌아서 공원까지 갔다 왔지 뭔가. 결국 귀인은커녕 비둘기만 보고 왔지만….

사실 내가 은퇴하고 나니, 사는 게 다 똑같아. 아침에 눈 뜨면 도서관 가서 신문 보고, 오후엔 공원 가서 산책하고. 만나는 사람이라곤 나랑 똑같이 늙어가는 친구들 아니면 바둑 두는 형님들뿐이야. 가슴 뛸 일이 없어. 내 심장이 뛰는 건 혈압 잴 때뿐이라니까?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 '오늘의 운세'에 목을 매게 되더구먼. '오후에 행운이 있다'라고 적혀 있으면, 혹시나 누가 돈 봉투라도 떨어뜨릴까 봐 땅만 보고 걷고, '언행을 조심하라'라고 하면 종일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어. 남들이 보면 주책이라고 하겠지만, 이거라도 안 보면 내 하루가 너무 밍밍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이상한 건가?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소중하게 오려낸 신문지 조각, '오늘의 운세' 란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는다.)


어르신, 이상한 게 아닙니다. 심심해서 그런 겁니다. 당신은 지금 미신을 맹신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평범한 하루에 '스토리'를 부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무사안일 거부 반응에 의한 인공 설렘 주입 증후군] (Artificial Thrill Injection Syndrome by Rejection of Boredom)입니다.

은퇴 전, 당신의 삶은 매일 전쟁이었고 사건 사고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 평화롭습니다. 도서관과 공원, 그 안전한 쳇바퀴 속에는 '반전'이 없으니까요. 영화가 끝났는데 엔딩 크레디트만 30년째 올라가는 기분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고작 신문지 귀퉁이의 몇 줄짜리 문장을 '오늘의 시나리오'로 삼은 겁니다. '동쪽으로 가라'는 지령이라도 있어야, 지루한 산책길이 마치 보물찾기 모험처럼 느껴지니까요.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물 많이 탄 숭늉 같습니다. 밍밍한데 자꾸 떠먹게 되죠.

사실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동쪽에 귀인이 없다는 걸. 하지만 당신은 속고 싶은 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하루'보다, 차라리 '조심하라'라는 경고가 있는 '긴장되는 하루'가 더 살아있는 것 같거든요.

당신이 운세에 집착하는 건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닙니다. '오늘이 어제와 똑같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당신은 늙어서 설렘이 사라진 게 아니라, 설레는 일을 만들지 않아서 늙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신문지보다 강력한 처방입니다.


내일부터 신문 운세란을 가위로 오리지 마십시오. 대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노트에 직접 쓰십시오. [오늘의 운세: 점심때 짜장면을 먹으면 기분이 째질 것이다] [오늘의 운세: 서점에서 무작위로 집은 책의 50페이지를 읽으면 감동할 것이다] 운명을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작가가 되어 하루의 사건을 '지시'하십시오.


맨날 가는 도서관 신문 열람실 말고, 한 번도 안 가본 '아동 도서 코너'나 '요리책 코너'로 가십시오. 거기서 만나는 그림책과 레시피가, 동쪽에서 기다리는 귀인보다 훨씬 더 신선한 자극을 줄 겁니다.


운세에서 '언행을 조심하라'라고 했나요? 반대로 하십시오. 공원 벤치에 앉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날씨가 참 좋죠?"라고 말을 거십시오.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건 활자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어르신, 당신의 운명은 신문지 귀퉁이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당신의 두 발끝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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