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15]
약속 취소는 '달콤한 독'입니다. 결국 친구를 잃게 되죠.
부제: 약속 1시간 전, 친구가 "나 오늘 못 나갈 것 같아"라고 해주길 기도하는 당신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20대 후반의 여성 손님이 들어온다.
세수도 안 한 부스스한 모습에,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쥐고 있다 놨다 하며 안절부절못한다. 표정에는 죄책감과 귀찮음이 50 대 50으로 섞여 있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갈등이 깊은 분이 오셨군요.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로 다시 다이빙하고 싶은데, 스마트폰 알림이 당신을 놓아주지 않는 상황이군요?
그 엄지손가락, '전송' 버튼을 누를까 말까 10분째 고민 중이시죠?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진짜 쓰레기인가 봐요.
오늘 저녁 7시에 친구랑 약속이 있거든요? 사실 이 약속, 2주 전에 제가 먼저 잡았어요.
그때는 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고,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우리 21일에 꼭 보자! 맛집 알아 올게!'라고 호들갑을 떨었죠.
그런데 막상 당일인 오늘이 되니까. 진짜 죽고 싶어요.
친구가 싫은 건 아니에요. 나가면 재밌는 것도 알아요.
근데 지금 이 침대에서 일어나서, 씻고, 화장하고, 지하철 타고 나가는 그 과정이 상상만 해도 숨이 막혀요.
아까부터 창밖만 보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제발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거나, 아니면 친구한테 급한 일이 생기길요.
방금 카톡 창에 '나 몸살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라고 썼다가 지웠어요.
친구가 먼저 '나 오늘 좀 피곤한데 다음에 볼까?'라고 해주면, 겉으로는 '아쉽다 ㅠㅠ'라고 하겠지만 속으론 춤이라도 출 것 같아요.
저 왜 이럴까요? 제가 먼저 보자고 해놓고, 왜 나가기 싫어서 꾀병까지 생각하는 걸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썼다 지운 '몸살 핑계' 메시지를 곁눈질하며 혀를 찬다.)
손님, 당신은 변덕쟁이가 아닙니다. 당신은 '악덕 사채업자'입니다. 누구한테냐고요? 바로 '미래의 자신'한 테요.
당신의 진단명은 [낙관적 편향에 의한 미래 자아 착취 증후군]
(Future Self-Exploitation Syndrome by Optimism Bias)입니다.
2주 전의 당신은 에너지가 넘쳤죠. 그래서 '2주 뒤의 나도 에너지가 넘칠 거야'라고 멋대로 낙관하고, 기분파답게 약속을 질러버린 겁니다.
그건 일종의 '신용 거래'입니다.
'오늘의 기분 좋음'을 위해, '미래의 내 시간과 체력'을 담보로 결제해 버린 거죠.
그리고 결제일(약속 당일)이 다가오자, 잔고(체력)가 바닥난 당신은 파산 신청하고 싶은 겁니다.
당신이 기다리는 친구의 취소 문자는, 빚을 탕감받는 '면책 선고'나 다름없으니까요.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김 빠진 맥주 같습니다. 딸 때는 시원했는데, 막상 마시려니 밍밍하고 배만 부르죠.
이 증상의 핵심은 '약속 취소의 해방감'입니다.
나가기 싫은 약속이 취소되었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고 짜릿합니다.
그 해방감! 다시 잠옷 입고 넷플릭스를 켤 때의 그 안락함!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쾌락의 대가는 '신용 불량'입니다.
한두 번은 '아픈 척'이 통하겠죠. 하지만 친구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당신이 약속 당일마다 핑계를 대는 '상습 부도범'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당신을 '부르지 않는 친구' 리스트에 올릴 겁니다.
그때 가서 "나 진짜 심심한데…."라고 해봐야, 당신의 신용 등급은 이미 바닥입니다.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신용 등급을 회복하고,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킬 처방입니다.
앞으로 약속은 최대 3일 이내의 것만 잡으십시오.
2주 뒤, 한 달 뒤의 내 컨디션은 신도 모릅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인사치레로만 하고, 진짜 약속은 "내일 저녁 어때?"라고 물을 수 있을 때만 잡으십시오.
나가기 싫어 죽겠다면, 아무 생각 말고 딱 욕실까지만 가십시오.
그리고 물을 트십시오.
일단 머리에 물이 닿으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씻게 됩니다. 씻고 나오면 50%는 성공입니다.
보통 "나가기 싫다"라는 감정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거든요.
정말 에너지가 없다면, 아프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타협하십시오.
"나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라 술은 못 마실 것 같고, 맛있는 밥만 먹고 헤어져도 될까?"
친구도 당신을 보고 싶은 거지, 당신의 '텐션'을 보고 싶은 게 아닙니다. 로우 텐션으로 만나도,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 이제 스마트폰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십시오. 친구가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