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신드롬 소믈리에 Ep. 16]

by 린나이

당신은 연애가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무균실 도파민'을 쇼핑하는 거죠.

부제: 밤새 '선재'를 보며 울고, 소개팅 남의 카톡은 '읽씹'하는 40대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세련된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40대 여성 손님이 들어온다.

피부 관리를 잘해 우아해 보이지만,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피로와 건조함이 내려앉아 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블루 라이트 차단 안경을 쓰고 태블릿 PC를 켠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여유롭고 경제적 능력이 있어 보이는 분이 오셨군요.

하지만 손님의 눈동자는 현실의 풍경이 아니라, 저 화면 속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유니콘'을 찾는 소녀의 눈빛 같군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제가 주책인 거 알아요. 나이 마흔 넘어서 아이돌 나오는 드라마 보며 밤새우는 거, 좀 그렇죠?

하지만 어떡해요. '선재'가 나만 바라보겠다고 우는데, 제 심장이 20대 때보다 더 뛰는걸요.

어제도 새벽 3시까지 정주행 하다가 베개 붙잡고 울었어요. '그래, 사랑은 저런 거지. 저게 진짜지' 하면서요.

그런데 막상 현실로 돌아오면 한숨만 나와요.

주변에서 자꾸 소개팅하라고 들들 볶아서 지난주에 한 번 나갔거든요?

상대가 전문직이라나 뭐라나. 그런데 딱 앉자마자 하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주식 얘기, 골프 얘기, 아니면 건강검진에서 용종 뗀 얘기.

그 사람 눈에는 제가 '사랑할 여자'가 아니라, '노후를 함께할 간병인 겸 룸메이트'로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집에 와서 바로 차단했어요.

그리고 다시 드라마를 켰죠. 화면 속 남주는 주름도 없고, 냄새도 안 나고, 오직 저만 사랑해 주잖아요.

현실 남자를 만나서 감정 소모하고 비위 맞출 바엔, 그냥 비싼 와인 마시면서 화면 속 남주랑 연애하는 게 훨씬 우아하고 남는 장사 아닌가요?

제가 눈이 너무 높아진 걸까요, 아니면 세상 남자들이 다 별로인 걸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의 태블릿 화면 속,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는 뽀얀 피부의 20대 남자 주인공을 보며 미소 짓는다.)


손님, 당신은 눈이 높은 게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오염된 현실'을 견딜 면역력이 바닥난 상태입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감정 노동 회피형 무균실 로맨스 증후군]

(Emotional Labor Avoidant Sterile Room Romance Syndrome)입니다.

40대의 연애는 20대와 다릅니다. '설렘'보다 '생활'이 먼저 치고 들어오죠.

현실의 남자는 드라마처럼 빗속에서 우산을 씌워주는 게 아니라, 비 오는 날 허리 쑤신다고 징징대거나 당신에게 우산을 가져오라고 시킬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당신은 그 지저분하고 피곤한 '생활의 때'가 묻는 게 죽기보다 싫은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균실'을 택했습니다.

드라마 속 로맨스는 세균(갈등, 생활고, 노화)이 하나도 없는 멸균 상태니까요.

당신은 사랑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방식으로 도파민만 '쇼핑'하고 싶은 것입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최고급 인공 감미료 같습니다.

입안에서는 황홀하게 달콤하지만, 삼키고 나면 몸에 아무런 온기도 남지 않죠.

당신이 현실 남자를 거부하는 건, 그들이 못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화면 속 남주는 당신에게 밥 차려달라, 이해해 달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기만 하죠.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서비스'입니다.

당신은 지금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OTT라는 업체가 제공하는 '유사 연애 서비스'를 구독하고 있는 고객일 뿐입니다.

서비스가 종료되면, 그 우아한 거실에 남는 건 결국 혼자 늙어가는 당신과 차가운 태블릿 PC 뿐이라는 게 함정이지만요.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차가운 무균실에 따뜻한 흙냄새를 불어넣기 위한 처방입니다.


로맨스 판타지는 인제 그만. 대신 '휴먼 다큐'나 '부부 예능'을 보십시오.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도 서로의 굽은 등을 긁어주는 중년 부부의 모습을 보며 인지하십시오.

"그래, 40대의 사랑은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서로의 손발이 되어주는 거지."

설렘이 아니라, 편안함으로 목표를 수정해야 합니다.


드라마 속 20대 남주를 연애 대상으로 소비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의 연인이 아니라, "아이고, 저런 아들 하나 있으면 좋겠다"라는 흐뭇한 대상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래야 현실의 40대 아저씨가 비교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전우'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장 사람을 만나기 싫다면, 식물이라도 하나 키우십시오.

물 주고, 햇볕 쬐어주고, 시들면 걱정하는 과정.

그 귀찮은 '돌봄 노동'을 해봐야,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감각이 되살아납니다.

사랑은 원래 좀 귀찮고, 손에 흙이 묻는 법이니까요.



image.png


작가의 이전글내 여친은 갱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