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17]
그건 '발작'이 아니라 '성장통'입니다.
부제: 3년 전 쓴 감성 글 때문에 밤마다 허공에 주먹질하는 당신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평범한 20대 후반 남성 손님이 들어온다. 멀쩡하게 걸어오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으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쥔다. 소믈리에와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 없었던 듯 헛기침하며 앉는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역동적인 등장을 하시는군요. 방금 그 비명은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시원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몸속에 있는 독소를 입으로 배출하려는 듯한 필사적인 몸부림 같았달까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혹시 틱장애나 조현병 초기 증상 아닐까요? 평소엔 멀쩡하거든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뇌를 습격해요.
어제는 설거지하다가 갑자기 대학생 때 짝사랑하던 누나한테 '누난 내게 있어 마약 같은 존재야'라고 카톡 보냈던 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악! 미친놈! 죽어! 죽어!'라고 소리 지르면서 수세미를 던져버렸어요.
자기 전에는 더 심해요. 침대에 누우면 10년 전 장기자랑 때 췄던 춤이 4K 화질로 재생돼요. 그럼 저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뻥 차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괴성을 질러야 진정이 돼요. 버스 안에서도 가끔 '흡!' 하고 소리가 튀어나와서 사람들이 쳐다본 적도 있어요. 제 뇌 속에 저를 괴롭히는 악마가 사는 게 분명해요. 이 쪽팔린 기억을 지우개로 싹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겠어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이야기하다가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을 보며 차분하게 진정시킨다.)
손님, 안심하세요. 당신은 미친 게 아닙니다. 당신의 뇌 성능이 아주 뛰어나서 생긴 일입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과거 자아 거부 반응에 의한 급성 수치심 역류 증후군] (Acute Shame Reflux Syndrome by Rejection of Past Self)입니다.
당신이 소리를 지르는 건, 뇌가 과거의 부끄러운 기억을 '현재의 위협'으로 오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생각 회로를 끊어버리려고 '비명'이나 '이불킥' 같은 강력한 물리적 자극을 자신에게 가하는 거죠. 일종의 '강제 종료(Reset)' 버튼을 누르는 겁니다.
이건 당신이 지금 아주 멀쩡한 사람이기 때문에 겪는 증상입니다. 만약 당신이 여전히 '누나는 마약' 같은 멘트를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쪽팔려서 소리 지를 일이 없겠죠? 당신의 비명은 "난 이제 그런 짓 안 해!"라는 강력한 선언이자, 과거의 지질했던 나와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고추냉이를 듬뿍 넣은 초밥 같습니다. 갑자기 코가 찡하고 눈물이 핑 돌지만, 정신이 번쩍 들게 하죠.
흑역사가 떠오를 때 괴로운 건, 당신의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당신은 그게 최선이었지만, 지금의 성장한 당신이 보기엔 수준 미달인 거죠. 그러니 그 쪽팔림은 당신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재미있는 건, 남들은 당신의 흑역사를 기억조차 못 한다는 겁니다. 그 누나는 당신의 문자를 받고 '뭐야?' 하고 1초 만에 잊었을 겁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 기억을 고화질로 복원해서, 매일 밤 혼자만의 상영회를 열고 괴로워하고 있는 셈이죠. 관객도 없는 극장에서요.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흑역사 상영회를 멈추기 위한 처방입니다.
기억이 떠올라 '악!' 소리를 지른 직후, 바로 이어서 이렇게 외치십시오. "악!.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사람을 죽였냐, 도둑질했냐!" 쪽팔림을 뻔뻔함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범죄만 아니라면, 젊은 날의 치기는 그냥 귀여운 실수일 뿐입니다.
당신만 지질한 게 억울하다면, 친구들의 흑역사를 떠올리십시오. 술 먹고 전봇대랑 싸우던 친구, 졸업사진 이상하게 찍은 친구. "그래, 인간은 원래 다 지질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막을 수 없다면 즐기십시오. 흑역사가 떠오를 때마다 스쾃을 10개씩 하거나, 윗몸일으키기를 하십시오. "이 쪽팔림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내 허벅지를 키우겠다." 1년 뒤면 당신은 엄청난 하체 근육을 가진, 몸 튼튼한 흑역사 부자가 되어 있을 겁니다.
자, 이제 나가실 때 소리 지르지 마시고, 당당하게 걸어 나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