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안경, 그리고 우물 밑바닥
억지로 빌려 간 만화책 열 권을 핑계로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덜 녹은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그의 아이스 음료와, 갱년기의 널뛰는 체온을 핑계로 시킨 나의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다.
어떤 맥락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취향의 교집합을 탐색하던 중, 그가 불쑥 물었다.
"혹시, 영화 <안경> 보셨어요?"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거. 그 감독 작품 최근에도 새로 나왔잖아요."
순간, 찻잔을 넘겨보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깊은 호수에 맑은 파문이 일어나는 순간. 그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제 주변에서 <안경>을 봤다는 사람, 처음 봤어요."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목소리였다. 영화 <안경>은 바닷가 조용한 마을에서 그저 멍때리기를 하며 흘러가는 시간을 담은, 지극히 정적이고 심심한 영화다. 스펙터클한 전개도, 자극적인 갈등도 없다. 그저 서늘하고 깊은 물 같은 영화. 나는 그 영화가 완벽하게 그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문득 노트에 적어두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우물 밑바닥에 내려가 본 사람이 있는가.'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깊고 어둡고 서늘한 곳. 나는 그가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고, 기꺼이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곳에서 혼자만의 완벽한 고요를 견디고 즐길 줄 아는 사람. 남자가 먼저 시그널을 보내지 않았던 건 오만함이 아니라, 그 깊은 밑바닥의 평화를 굳이 깰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치밀어 오르는 갱년기의 열화(熱火) 속에서, 나는 요즈음 스스로가 통제되지 않는 들불 같다고 느꼈다. 내 속이 시끄럽고 뜨거워 미칠 지경이었기에, 역설적으로 그의 깊고 서늘한 우물이 그토록 절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거기서 사람들이 매일 아침 메르시 체조를 하잖아요. 저도 가끔 속 시끄러울 때 그거 따라 해보고 싶더라고요."
내 농담에 그는 마침내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한여름에 마시는 냉수처럼 시원하고 청량했다.
다르고 낯설어 보였던 우리의 겉모습 아래로, 아주 깊숙하고 내밀한 취향의 주파수가 맞아떨어진 날. 나는 기꺼이 나의 뜨거운 불길을 잠재워 줄 그의 깊은 우물 속으로, 조심스럽게 두레박을 내려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