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20]
당신은 만나는 중이 아닙니다. 미리 '애도'하는 중입니다.
부제: 좋은 친구가 생기면 이별할 생각부터 하며 마음의 문을 반만 여는 당신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은은한 국화차 향기가 묻어나는 60대 초반의 손님이 들어온다. 인상이 참 선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배어있다. 손에는 지인에게 줄 작은 선물 상자가 들려있는데, 그걸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점잖고 배려심 깊은 분이 오셨군요. 그런데 손님, 오늘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러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표정은 설레 보이는데, 눈빛은 마치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아련하고 슬퍼 보입니다. 환영회와 송별회를 동시에 하는 기분이신가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 양반, 눈썰미가 좋구먼. 맞아요, 오늘 새로 사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맞는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참 귀한 인연을 만났지 뭡니까. 대화도 잘 통하고 취미도 같고….
그런데 이상하죠? 그 친구가 좋으면 좋을수록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요. '이 관계는 또 얼마나 갈까? 3년? 5년?'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영원할 것 같던 친구들도 10년 주기로 싹 물갈이가 됩디다. 어떤 놈은 돈 때문에 떠나고, 어떤 놈은 자식 자랑하다 멀어지고, 어떤 놈은 그냥 이유도 없이 연락이 끊기고.
그래서 이번엔 안 그러고 싶어서 내가 엄청나게 조심해요. 실수 안 하려고 말도 가려 하고, 밥값도 내가 먼저 내고, 늘 웃는 얼굴만 보여주죠. 그런데 그게 참 피곤해요. 친해지고 싶은데, 너무 정 주면 나중에 떠날 때 아플까 봐 브레이크를 밟게 돼요. 좋은 사람을 만났는데, 왜 나는 헤어지는 엔딩 크레디트부터 상상하고 있을까요?“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쥔 선물 상자를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두려움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어르신, 당신은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시작과 동시에 '상조 가입'부터 한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관계 유통기한 강박에 의한 사전 애도 증후군] (Pre-emptive Mourning Syndrome by Relation Expiration Anxiety)입니다.
당신은 경험을 통해 '모든 관계에는 유통기한이 있다'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학습했습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완벽한 타인이 되기로 결심한 거죠. 당신이 말하는 그 '조심함'과 '다정함'은 사실 배려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했으니, 떠나지 마"라는 애원이거나, "나는 너에게 흠 잡힐 짓을 안 했으니, 나중에 헤어져도 난 상처 안 받을 거야"라는 방어막입니다.
꽃이 피기도 전에 시들 걸 걱정해서, 조화만 사다 나르는 꼴이죠. 조화는 시들지 않지만, 향기도 없지 않습니까?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너무 일찍 딴 떫은 감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달콤해질 텐데, 상처받기 싫어서 덜 익은 상태로 두고 보는 맛이죠.
어르신, 10년마다 인연이 리셋되는 건 비극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도 7년이면 완전히 새로운 세포로 바뀝니다. 사람도 변하고 상황도 변하는데, 관계만 고인 물처럼 영원하길 바라는 건 욕심 아닐까요?
당신이 헤어짐을 걱정하며 '착한 사람' 연기만 하는 동안, 그 친구는 당신의 진짜 모습을 볼 기회를 잃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섭섭해하지도 않는 관계? 그건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이별을 두려워해서 친 안전한 울타리가 그 사람을 더 빨리 떠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재미가 없으니까요.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겁먹은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을 처방입니다.
사람을 '평생 소장품'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계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아, 이 친구는 내 인생의 여름에 찾아온 손님이구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고 해서 여름이 무의미했던 건 아니잖습니까? 언젠가 끝날지라도, 지금, 이 순간 뜨겁게 사이좋게 지냈다면 그것만으로 그 관계는 성공한 겁니다.
너무 잘해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진짜 인연은 당신이 밥값을 안 내거나, 우울한 소리를 하거나, 조금 찌질한 모습을 보여도 곁에 남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완벽한 매너'를 조금 헝클어뜨리십시오. 그 틈으로 진짜 정이 들어옵니다.
자꾸 10년 뒤를 상상하며 미리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냥 오늘 그 친구랑 마실 막걸리 맛, 오늘 나눌 수다 떨기에만 집중하십시오. "헤어지면 어때? 오늘 재밌으면 됐지." 이 배짱이 당신을 더 매력적인 친구로 만들어 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