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신드롬 소믈리에 Ep. 21]

by 린나이

신은 당신의 정강이를 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부제: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고 자신의 도덕성을 검열하는 당신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30대 여성 손님이 한쪽 다리를 살짝 절뚝거리며 들어온다.

그녀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테이블 모서리를 마치 무서운 맹수 보듯 경계한다. 얼굴에는 고통보다도 어떤 깊은 반성과 자책의 빛이 서려 있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겸허하고 반성하는 태도가 몸에 밴 분이 오셨군요.

방금 절뚝거리며 들어오실 때, 입술을 깨물며 "아, 역시…."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상처가 단순히 부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어떤 거대한 운명의 심판이라고 믿고 계신 모양이군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오늘 아침에 거실 나가다가 문지방에 새끼발가락을 정말 세게 찧었거든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핑 도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장면이 지나가는 거예요.

어제 편의점에서 거스름돈 500원을 더 받은 걸 그냥 주머니에 넣었던 기억 말이죠.

'아, 신이 나에게 벌을 주시는구나. 500원의 대가가 이 고통이구나' 싶더라고요.

이게 처음이 아니에요.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아까 엄마 전화 귀찮아서 안 받은 것 때문인가?' 싶고,

샤워하다가 비눗물이 눈에 들어가면 '아침에 동료 흉을 봐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은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하고 넘기라는데, 저는 자꾸 저의 잘못과 이 사고들을 연결하게 돼요.

세상의 모든 가구가 저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고, 제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응징하러 오는 기분이에요. 저 진짜 큰 벌을 받으려고 이러는 걸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경계하던 테이블 모서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 짓는다.)


손님, 안심하십시오. 당신은 대단한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이 세상의 무작위성을 견디지 못하는 나르시시즘적 죄책감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생활 밀착형 응보 강박 증후군]

(Domestic Retribution Obsession Syndrome)입니다.

인간의 뇌는 이유 없는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냥 부주의해서 부딪혔어"라는 단순한 사실보다, "내가 잘못을 해서 벌을 받은 거야"라는 해석이 오히려 마음 편할 때가 있거든요.

그건 내가 잘못을 바로잡으면 다음 고통을 막을 수 있다는 통제욕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주의 창조주가 고작 당신의 500원짜리 양심을 심판하려고 가구 배치를 바꾸거나 당신의 보폭을 조절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너무 과하게 중요한 인물로 설정하고 계신 겁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미신으로 우려낸 쓴 한약 같습니다.

몸에 좋지도 않은데, 왠지 이걸 마셔야 나쁜 일을 피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죠.

이 증상의 핵심은 마술적 사고입니다.

상관없는 두 사건을 억지로 연결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착하게 산다고 해서 가구 모서리가 푹신해지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성인군자가 되어도 중력과 관성의 법칙은 당신을 비껴가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모든 사고를 '벌'로 해석하면, 당신은 평생을 감옥에서 사는 기분일 겁니다.

발가락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마음마저 죄인이 되어야 한다니. 이건 너무 가혹한 셀프 고문 아닙니까?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부어오른 발가락과 억울한 양심을 위한 처방입니다.


다음에 무언가에 부딪히면, 신의 뜻을 찾지 말고 물리학의 법칙을 읊으십시오.

"내 발의 속도와 문지방의 강도가 만나 충격량이 발생했다. 이건 운동 에너지의 변환일 뿐이다."

신학이 아니라 물리학으로 상황을 정리하면, 불필요한 죄책감이 끼어들 틈이 사라집니다.


잘못을 빌고 싶다면 신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치인 가구에게 하십시오.

"미안하다 식탁아, 내가 눈이 침침해서 널 못 봤네."

사고의 원인을 외부의 '벌'이 아닌 나의 '부주의'로 돌리는 연습입니다.


정 마음이 불편하다면 발가락 치료비라고 생각하고 넘기십시오.

그 500원으로 기부하거나 편의점에 돌려주되, 그걸로 모든 액땜이 끝났다고 믿으십시오.

고통은 벌이 아니라, 그냥 인생이라는 길에 튀어나온 작은 돌멩이일 뿐입니다.


자, 이제 돌아가실 때는 발밑을 잘 살피세요. 신이 아니라 당신의 시력이 당신을 지켜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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