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22]
풍경을 지워버린 당신만의 수학여행
부제: 자동차 번호판부터 포커판까지 사칙연산으로 해체하는 수식 강박자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40대 남성 손님이 들어온다.
그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인다.
눈동자는 빠르게 움직이고, 손가락은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계산하듯 허공을 두드린다.
마치 엄청난 난제를 풀고 있는 학자처럼 보이지만,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인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정밀하고 치밀한 에너지를 풍기는 분이군요.
그런데 손님, 눈동자가 몹시 충혈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도로 위의 모든 자동차와 전쟁이라도 치르고 오셨습니까?
풍경을 감상하며 오셔도 모자랄 시간에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천 번의 연산을 끝내신 것 같군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좀 살려주세요. 제 뇌에는 정지 버튼이 없는 것 같아요.
차를 타고 어딜 가면 경치를 보라는 아내의 말이 들리지도 않아요.
제 눈에는 앞차의 번호판만 보여요. 2, 4, 8, 2…. 이 숫자들이 보이면 제 뇌는 즉시 가동됩니다.
2 더하기 4는 6, 8 나누기 2는 4, 6 빼기 4는 2. 아니야, 이건 너무 쉬워.
2 곱하기 4는 8, 8 나누기 8은 1, 거기에 2를 곱하면 2.
어떻게든 이 네 숫자를 조합해서 0이나 1, 아니면 딱 떨어지는 깔끔한 숫자를 만들어야 잠이 와요.
어떨 때는 수식이 안 풀려서 루트까지 동원해요. 루트 4는 2니까, 2 빼기 2는 0. 이런 식으로요.
저는 제 머릿속 시뮬레이션이 딱 떨어질 때까지 멈출 수가 없어요.
숫자들이 제발 저를 좀 놓아줬으면 좋겠어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적어 내려간 복잡한 수식들을 보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손님, 당신은 수학이나 게임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무질서한 세상에 억지로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수치적 균형 강박에 의한 연산 과부하 증후군]
(Numerical Balance Obsession & Calculation Overload Syndrome)입니다.
이 세상은 본래 무작위적이고 불완전합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자동차 번호판이나 섞여 있는 화투 패는 그저 무의미한 나열일 뿐이죠.
하지만 당신의 뇌는 그 의미 없음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 숫자들을 사칙연산이라는 도구로 묶고, 루트라는 마법을 부려서라도 하나의 정답으로 수렴시켜야만 안도감을 느끼는 겁니다.
당신은 지금 도로 위에서, 그리고 도박판 위에서 우주의 질서를 혼자 바로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손님, 그 수식을 푼다고 해서 앞차가 더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 판돈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그저 뇌라는 엔진을 공회전시키며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차가운 금속성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드라이한 화이트와인 같습니다.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목을 타고 넘어갈 때의 온기가 전혀 없죠.
당신이 숫자에 집착하는 동안, 당신의 인생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창밖의 노을이 얼마나 붉었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내의 표정이 얼마나 쓸쓸한지, 당신은 전혀 보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세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계산되어야 할 것으로 변해버렸으니까요.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정답을 내리려는 습관은 당신을 유능하게 만들지는 몰라도,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인생은 정답이 없는 주관식 문제인데, 당신은 자꾸 객관식 1번 아니면 0번으로 세상을 압축하려 하니 머리가 아플 수밖에요.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과열된 뇌 엔진을 끄고, 풍경을 되찾아줄 처방입니다.
일부러 수식이 풀리지 않는 번호판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소수점이 무한대로 이어지는 지저분한 숫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연습을 하세요.
세상에는 딱 떨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당신의 긴장도 느슨해질 겁니다.
번호판이 보이면 숫자를 읽지 말고 색깔을 읽으십시오.
"흰색 바탕에 검은 글씨구나", "번호판 가드가 파란색이네"라고 말입니다.
좌뇌의 연산 기능을 잠시 끄고, 우뇌의 시각적 감상 기능을 강제로 켜야 합니다.
수식을 푸는 데 쓰던 뇌의 용량을 상대방의 웃음소리에 투자하십시오.
그 어떤 복잡한 확률 계산보다 당신의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자, 이제 계산기는 내려놓고 저기 창가에 비치는 햇살의 각도나 감상하시죠.
그건 계산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