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으로 인생 돌아보기
(이것은 상상 글입니다. 실화인 줄 아시고 전화가 왔네요^^)
의식이 서서히 흐려진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한다. 한 달 전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연속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하루 종일 병실에 누워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잠깐 보는 남편과 아이들이 너무 기다려졌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느니 퇴원을 하겠다고 맘먹었다. 진통제만 처방된다면 삶의 마지막은 집에서 보내고 싶었다. 평생 두려워했던 삶과의 이별을 제법 차분히 맞이하고 있어 다행이다. 통증이 무섭지 더 이상 죽음은 두렵지 않다. 지난 1년간 모든 것과 이별할 준비를 했다. 마지막 순간, 내 정신은 육체에서 분리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리라.
1년 전쯤, 병원에서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머리에서 찌릿한 전기 신호가 나며 잠깐 어지러웠지만 의외로 차분했다. 위기의식이 발동한 걸까. 내 삶이 아직 1년이나 남았다는 걸 긍정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머리에서 확인하는 데 단 몇 분이 걸렸을 뿐.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이별을 준비하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졌을 뻔했다. 다행이었다. 나의 이런 차분한 반응에 나도 놀랐다. 병원에서 갑작스러운 진단을 받던 그날 저녁 남편의 손을 잡고 방향 없이 한참을 걸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조용한 찻집에 앉았다. 남편은 입이 더 무거워졌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평소처럼 내뱉었다.
"우리가 바쁘게 살다 보니 하루에 20분도 얼굴 보며 얘기를 못하잖아. 1년에 대화 시간이 고작... 7,300분도 안 되는 거야. 나는 핸드폰 계산기를 켜고 20 x 365를 누르며 말을 했다. 앞으로 30년을 이렇게 같이 더 산다면 곱하기 30이니까 219,000분 정도야. 60분으로 나누면 3,650시간 이야. 이젠 양보다 질이야. 남은 1년 동안 당신이랑 3,650시간 이상을 대화하면서 재밌게 보낼 자신 있거든. 당신도 그동안 쉬지도 못하고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애썼잖아. 나 소원이 있어... 당신 1년만 휴직하고 나랑 같이 놀아주라. 다른 소원은 없어... "
남편은 말없이 긴 한숨을 쏟아 냈다.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편의 얼굴에 실낱 같은 미소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럽시다."라고 했다. 정말 남편과 하루 10시간 이상 대화할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30년을 같이 살면서 말할 시간보다 1년 동안 대화할 시간의 합이 더 많다니 위안이 됐다. 더 일찍 죽는다고 그리 슬플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먼저 계획이 필요했다. 남편은 곧바로 휴직서를 제출했다. 1년 후로 사망 예정일을 받은 후 1주일간 우리는 내게 남은 1년을 어떻게 보낼지 머리를 맞대고 계획했다. 남편 회사 짐이 집으로 도착했다. 25년 만에 회사를 처음으로 벗어난 남편의 표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내가 12년간 회사를 다니다 퇴사했을 때를 떠올렸다. 남들은 출근하는 그 아침에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의 그 어색한 두근거림이 기억났다. 내 경험보다 큰 낯선 기분이 들지로 모른다.
우리는 마당이 있는 집을 갖기로 했다. 일산이 좋을까 분당이 좋을까 고민을 좀 했었다. 결국 분당으로 정했다. 큰 병원이 있고, 사통팔달 교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당 구미동 변두리에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계약했다. 우선 살던 아파트를 부동산에 내놨다. 주말에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찾아보러 분당에 갔다. 부동산에 등록된 몇 개의 전원주택을 돌아본 뒤 가장 마음이 편한 집으로 결정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 전세 계약도 쉽게 이뤄졌고, 받은 전세 계약금으로 우리가 이사할 단독주택 계약금을 치렀다. 예상보다 이사 일정이 잘 잡혀 다행스러웠다.
나의 병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죽음이라는 말이 몰고 올 통곡 릴레이로 소중한 시간을 축내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몸은 견딜만하고 통증이 오면 진통제를 먹는다. 이 정도의 컨디션이라면 한 달 정도 가족 여행을 계획해도 좋다고 판단했다. 어디가 좋을까? 고민 끝에 우리는 뉴질랜드를 최후의 가족여행지로 선택했다. 얼마 전 뜬금없이 작은 딸이 가고 싶다고 했던 곳이다. 인터넷으로 오클랜드시 변두리에 아파트 하나를 한 달간 렌트했다.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털어 왕복 티켓 두 매를 구입했고, 아이들 티켓 두 장을 별도로 구입했다. 여행 준비가 끝났다.
둘째가 대학에 입학하면 여행을 한 번 하자고 했으나 코로나로 어렵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여행 계획이 잡히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아이들은 서둘러 휴학을 했다. 그곳에서 아침에 여유롭게 일어나 장을 보고 맛있는 거 같이 해 먹고 사 먹고 가보고 싶은 곳을 찾아 놨다가 다녀오고 우리 가족만의 게으른 스타일로 보낼 것이다.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시간을 뭉개며 여유를 부리다 오면 더 이상의 여행을 갈구할 것 같지는 않다. 뉴질랜드를 최후의 여행지로 결정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관광보다는 휴양을 선택한 것이었다. 신의 작품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가족들과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이 절경을 마주하고 "아, 이대로 죽어도 소원이 없다"는 말을 왜 하는지 공감할 수 있었다. 생의 마지막에 여유로운 일정을 배치함으로써 엄마가, 아내가 그리울 때 꺼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귀국하는 주말에 분당으로 이사했다. 이삿짐은 우선 대강의 위치를 배정하고 매일 조금씩 정리했다. 여행 중에 온 가족이 합의한 것은 귀국하여 반려동물을 들이자고 했었다. 평소 남편이 키우고 싶다고 노래하던 강아지를 먼저 입양했다. 아이들이 부탁한 대로 동네 유기견 센터에서 첫눈에 반한 녀석을 선택했다. 사람의 표정을 아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다음 주에는 내가 꿈꾸던 고양이 2마리도 입양했다. 강아지 혼자 외롭지 않을까 하여 인터넷 카페를 뒤지다 인근 주택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더 입양했다. 대가족이 되었다. 반려동물이 있는 삶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남편도 나도 그 애들을 손주처럼 돌보고 놀아주느라 하루 종일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강아지들이 편하게 지낼 집과 고양이들의 놀이터인 캣타워를 손수 만들었다.
가족끼리 공방에 가서 이것저것 만들어 봤던 기억이 도움이 됐다.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 큰 딸이 라이노 프로그램으로 설계를 한 뒤 공방에 가서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몇 시간 동안 작업에 집중하고 나면 온 몸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고 스트레스는 사라졌다. 창작의 욕구는 본능에 속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집에 목공실을 두기로 했었다. 이사하면서 맨 처음으로 마당 한편에 목공실을 지었다. 그곳에 목공 도구를 갖다 놓았다. 안전한 기계톱과 대패 기계, 프라이머와 페인트, 보안경, 각종 못 등 공방에서 눈여겨봤던 여러 가지 공구들을 구입했다. 인터넷에서 좋은 원목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강아지 집 두 채를 지었다. 유튜브에서 집짓기 프로그램을 장기간 구독했던 터라 그 동영상을 반복 시청하며 며칠 만에 그럴듯한 모습의 강아지 집을 완성했다. 강아지들은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자기 집인 줄 알았다. 강아지들은 주로 넓은 마당에서 뛰놀다가 개구멍을 통해 베란다로 들어올 수도 있게 했다. 녀석들은 배가 고플 때 밥 달라고 잠깐 집으로 들어왔고 주로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거나 쉬었다.
고양이들은 집안을 좋아했다. 문밖으로 나갔다간 강아지들이 달려들어 귀찮게 해서 마당을 꺼렸다. 방문마다 위쪽에 구멍을 뚫고 그 아래 벽에 선반을 계단식으로 붙였다. 온 집안에 고양이 전용 레이싱 트랙을 설치해 주었다. 새벽만 되면 이 두 녀석들의 질주가 시작된다. 마음껏 뛰어놀고 잘 먹어서 그런지 한 달쯤 지나고 보니 길양이의 처량한 표정이 많이 가셨다. 더 이상 사람을 꺼리지 않고 애교를 부리며 먼저 다가온다.
마당엔 잔디를 깔고 나무와 꽃을 심었다. 나무로 나지막하게 울타리를 두른 다음 텃밭으로 나가는 쪽문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텃밭에 우리가 먹을 야채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면 상쾌했다. 많이 자란 채소를 한 바구니 뜯어서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다. 넓은 부엌 한가운데에 아일랜드 식탁을 두었다. 가족뿐 아니라 집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각자 일을 분담하면 금세 먹을 준비가 완성됐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득한 부엌은 놀이공간이었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농담도 하며 조금씩 가져온 음식을 곁들여 내면 식사가 준비된다. 메인 요리사는 남편과 작은 딸이 맡았다. 나는 전체 매니저와 설거지 당번을, 큰 딸은 설거지와 빨래 당번을 자처했다.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피아노를 부엌 옆 거실에 두었더니 딸들과 손님들이 시시 때때로 연주를 해서 행복하다.
이사 온 지 두 달이 되었다. 남편과 나는 지난주 마당에 커다란 테이블도 만들었다. 의자를 열 개 사서 테이블 주변을 빙 둘러놓았다. 앞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주말에 집으로 부르기로 했다. 위층 다락방을 깨끗이 손질하여 손님방으로 만들었다. 이사했다 알리고 보고 싶다고 초대한 사람들은 마치 낯선 타국 여행을 온 것처럼 행복해했다. 금요일 저녁에 온 손님들은 시간 여유가 되면 토요일 밤도 묵고 일요일에 귀가했다. 2박 3일을 같이 음식을 나누고, 영화도 보고 악기로 연주했다. 가끔 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씩 놀다 가기도 했다. 그들은 꼭 주말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친구와 수다를 떨고 싶은 날 편하게 와서 정신없이 며칠 놀며 좋아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나니 마음의 문제가 많이 해소됐노라며 고마워했다. 우리는 누구든 와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거리를 하나씩 모아갔다. 언젠가부터 인테리어에 관심이 가서 밤늦게 까지 관련 해외 유튜브를 구독했었다. 그때 배운 내용을 기억하며, 딸들이 그린 그림을 액자에 담아 방방마다 벽에 걸었더니 집이 따뜻한 갤러리 같다고들 했다.
예상보다 빨리 새 집에 적응했다. 주변에 산이 있고 마당과 텃밭이 있으니 도시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시골 내기 부부는 마치 귀향한 기분을 느꼈다. 책을 내고 싶다며 꾸준히 쓰던 글 꼭지들을 모아 <마음 다치지 않게 두 딸을 독서로 명문대 보내기>를 출판했다. 집에 배달된 내 인생 첫 책의 표지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인생에도 사회에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남기는 기회가 있다니 자부심이 밀려왔다. 가족 친인척, 주변인들이 내 책을 구입했다. 인터넷에서 하루에도 몇 번을 판매 부수를 체크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정말 팔릴까?' 하는 마음으로 지난 1년을 엎치락뒤치락하며 글을 써왔다. 팔리지 않더라도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갑자기 판매 부수가 올라가 왜 그런가 의아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내 책을 홍보 중이라고 했다. 친한 학부모 한 분도 자신의 지인을 총동원하여 책의 좋은 취지를 알리면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책을 구입하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내 일처럼 거들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두어 달 동안 편집을 계속하면서 편집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 교육이 뒤틀릴 대로 뒤틀려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를 보면서 무척 안타까웠다. 아이들을 괴롭혀야 교육일까. 모든 것을 수치화하여 줄을 세우기를 12년 이상 한 위에 서열화된 대학에 점수에 맞춰 들어가는 것을 누구나 비난하면서도 피하질 못했다. 첫 책이라 경험이 얕은 티가 여러 군데에서 났지만 많이 팔려 읽히길 진심으로 바랐다. 지인들의 자발적인 노력 덕분으로 예상보다 많은 부수가 판매되었다.
방송국에서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교육 문제를 해소하며 더 적합한 제도가 생겨날 때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가 방송이라고 생각했다. 어설픈 문제의식으로 섣불리 진단하고 나온 해결책으로는 상황이 악화될 뿐이다. 정치 사이클에 맞춰 선거 때가 되거나 연말이 되면 입시제도를 그저 이리저리 굴리며 한구석에 변경을 가하는 것을 교육 개혁이라 칭하고 있었다. 사교육을 줄이겠다고 변경된 입시제도는 항상 취지와는 정반대로 사교육을 늘렸다. 사교육은 갈수록 늘고, 공교육은 점점 기능을 잃어 교사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유튜버들의 연이은 초대로 방송 횟수가 늘어가자 카메라 울렁증이 많이 해소되었다.
"전체에 대한 전망 없이 매년 입시제도를 변경하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대통령 직속기구로 교육개발위원회 같은 특별기구를 설치해야 합니다. 100년 앞을 내다본다는 관점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우리 경제 개발을 견인하듯이 교육도 교육의 주최들이 머리를 맞대고 장기 기획을 해야 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에서 강연을 요청했다. 교육부 주도하에 개최된 "제4차 산업시대, 우리 교육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포럼에도 연설자로 초청되었다. 서울교육청의 초대로 "공교육 부활을 위해 학교가 해야 할 일"이라는 포럼에도 발언자로 참석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개인의 작은 노력이 모여 마침내 유태인 교육 부럽지 않을 교육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은 4차 산업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나의 첫 책을 발행한 출판사에서 두 번째 책에 대해 상의하자며 우리 집을 방문했다. 두 번째로 꼭 쓰고 싶은 책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비효율적인 시스템의 문제와 대안에 대한 내용이다. 이 주제도 오랫동안 품어왔던 내용이라 꼭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가칭 제목은 <우리 아이 집에서 유학하기: 영어가 왜 공부일까?>로 정했다. 준비해 둔 목차와 습작 글 세 편을 보여줬더니 이대로 진행하자고. 2개월 후에 초고를 완성하기로 약속했다. 짧은 기간에 책을 두 편이나 완성하다니 감사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를 털어놓았더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내 인생의 마지막 300여 일간 매일 적은 일기를 모아 약식 자서전을 만들었다. 출판용이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다.
특별한 노력 없이도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나고, 이때가 글쓰기에 집중력이 가장 좋았다.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4시간가량을 집중하여 하루 10쪽 정도를 쓸 수 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텃밭에 풀을 매거나 씨를 뿌리는 등 일을 하고 들어오면 몸이 노곤하다. 그리고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주로 목공일을 이어갔다. 작은 목공 소품을 만들어 뒀다가 놀러 오는 손님들에게 선물로 줬다. 다들 무슨 명품이라도 받은 듯 반응이 좋아 자꾸만 무언가를 더 만들 궁리를 하게 되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쌓아놓고 읽다가 스르르 낮잠을 잤다.
이번 달부터 남편도 책 쓰기에 합류했다. 무협지광에 영화광인 남편은 글을 써보라는 내 제안에 "기회가 되면 나도 무협지 하나를 쓰고 싶긴 했어."라고 한다.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를 하면서 자신의 기량을 닦고 있다. 갑작스러운 휴식이 자기 발견의 기회가 될 줄이야. 지난 25년간 몸담았던 컴퓨터 코딩 경험을 책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우선 시작하고 실수하며 더 좋은 방법을 찾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시작 전에 고심이 많고 들뜨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남편 글을 읽으며 내가 모르던 남편의 아픔과 깊은 고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남편은 "생각을 입 밖으로 모두 내어놓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라고 했었다. 남편은 자신의 생각을 일일이 말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일치시켜주었다. 그의 이런 태도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의 글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나와 남편을 소개하신 s생명 김영희 씨는 한 번은 그랬다. "ㅇㅇ씨는 흙 속의 진주야. 그런 사람을 알아본 건 미향 씨 복이지만." 남편의 대학교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 친구가 말했다. "법 없이도 살 놈이에요"
병원에서 1년의 여생을 선고받은 날부터 저녁마다 일기를 썼다. 덕분에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고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한 달이 남았다. 간혹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오면 이쯤에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진통제로도 별 소용이 없다. 할 수 없이 집 근처 병원에 입원했다. 슬슬 지인들에게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남편은 아이들을 임신을 했을 때보다 더욱 정성껏 나를 챙겨준다. 밥을 먹으면 진통제를 제시간에 먹게 하느라 애를 쓴다. 내가 아이들 교육 문제에 골몰하던 때 그런 나를 줄곧 지켜보다 힘들어하면 "당신 줄을 잘 서야 해. 당신 나이 들어 아프면 간호할 사람은 애들이 아니라 나야."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었다. 진심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따뜻한 미소로 지켜봐 주고 응원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 부모님의 반복되는 갈등을 보며 남자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내게 남편은 아팠던 내 마음을 치유할 수 있게 따뜻했다. 지난 1년 동안 30년어치 보다도 더 많은 얘기를 나눴다.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한 만큼, 내가 가면 그는 많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라는 통증 예방법과 치료법을 알고 있으니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서로를 위해 일찍이 보험을 들어두었다. 혹시라도 먼저 생을 마치는 사람이 배우자에게 남길 병원비가 가족의 부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긴급자금으로도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각자의 보험의 수익자를 남편과 나로 정해두었다. 보험금은 저축과 달리 한 사람의 질병이나 사망으로 남은 가족이 허우적거리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재무 계획이라고 배웠다. 내가 떠난 후 좋은 여인을 만나 여생을 살면 좋겠다. 돈이 쪼들리면 좋은 여자를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고 이를 내가 알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지난번 시댁에 갔을 때, 톰 행크스가 주연한 "캐스트 어웨이"를 오랜만에 다시 봤다. 4년간 무인도에서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탈출한 톰 행크스는 귀가 후 그렇게도 그리던 아내가 다른 남자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고 고통스러웠다. 아내의 입장에서도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아왔으니 얼마나 혼돈스러웠을까... 산사람은 살아야 하고 기왕이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한 달이 남았다. 아이들은 내 앞에서는 밝고 의연하게 대처한다. 몇 달 전부터 남편과 함께 우리 가족이 걸어왔던 24년의 삶을 정리하려고 집에 있는 사진과 영상을 모두 모아 CD로 만들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감사한 시간들"이라 제목을 붙여서 아이들과 남편에게 하나씩 주었다. 기억에서 모두 사라지지 않게 서로 연결된 경험들을 영상으로 담았다. 아이들은 내 앞에서는 웃음을, 혼자된 시간은 무척 아픈 시간을 견디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내가 못다 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기에 담았다. 마지막 날에 내 침대 곁에 두고 눈을 감을 것이다. "엄마가 아주 편하게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건 내 살붙이인 너희들이 있어서야. 너희가 앞으로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것을 믿을게. 마음 편해. 외롭지도 않고. 사랑한다 딸들. 여보 우리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