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대화를 위하여
대학 졸업 무렵의 일이다. 취업을 할지 대학원 진학을 할지 고심하던 중에 우선 영어 회화라도 익혀보자고 마음먹었다. 시간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어학원의 새벽반에 등록했다. 직장인과 대학생이 섞인 성인반으로, 수강생은 십여 명 있었다. 첫 시간이라 수강생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그중 눈에 띄는 한 분이 계셨는데, Tom이라는 65세의 직장 은퇴자셨다.
다음으로, '오늘의 주제'에 대한 자료를 나누어 준 원어민 교사는 기본적인 설명을 한 뒤 우리에게 그룹 활동을 하게 했다. Tom이라는 그분은 매우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셨다. 우리는 Tom을 부르며 매우 활기차게 주제 토론을 했다. 쉬는 시간이 되었다. 수강생들은 휴식을 하며 짧게 인사도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동안 아무도 Tom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걸지 못했다. Tom은 그저 조용히 자리에 앉아 계셨다. 수업시간에는 편안하게 부르며 말을 걸 수 있었던 Tom이었는데, 휴식 시간에는 아까와 같은 Tom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어, 이 차이는 뭐지?....' 쉬는 시간이 되자 갑자기 그분을 부를 호칭이 없었다. Tom이라 부르면 결례일 것 같은 기분. 설령 한글 성함을 안다고 해도 그분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할어버지', '사장님' '아저씨' 등등 어느 것도 그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본능처럼 느끼고 있었다. 수업 시간처럼 그분에게 '오픈 마인드'가 되지 않아 말을 걸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고 우리말을 쓰게 되자 그분은 Tom이라기 보다는 예의에 엇나갈까 두려워 차라리 말을 걸지 않는게 나은 '어르신'으로 생각되었다. 요즘은 호칭이 애매할 때 '선생님'이라 부르는 풍토가 생겨 다행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좀 낯간지러울 때도 있으나 적절히 존중을 담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해방감을 준다. 90년대 초반이던 당시에는 Tom의 연세에서 오는 무게감을 넘지 못하고 쉬는 시간이면 서먹서먹하게 나이 차이가 커지곤 했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면 마치 그분이 변신이라도 한 듯 우리들은 Tom이라는 호칭을 부를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Tom이라는 호칭은 간데 없고 우리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거리를 둔 예의만 갖췄다.
우리말은 직급이나 직책으로 상대를 호칭하는 문화가 있다. 정사장, 정상무, 정부장, 정과장, 정대리 ... 우리말은 높낮이가 있는 직책을 넣어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누군가를 부를 때는 연령과 친밀도 등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반말과 존댓말 사이에서 적절한 뉘앙스를 선택한다. "아까부터 나이도 한참 어린데 나보고 '정과장'이래....." 호칭의 예의를 잘 지키지 못한 다음의 대화는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을 위험이 있다. 최근에 승진한 '정과장님'을 '정대리님'으로 호명하는 것도 결례에 속한다. 따라서 익숙하지 않은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서 우리말로 대화를 할 때는 영어로 말할 때보다 뜸을 들이거나 침묵이 더 많이 활용된다. 직책을 알 수 없으면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알게될 때까지 뜸을 들여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있다.
90년대 CJ그룹은 직원간에 직급 대신 상호 'ㅇㅇㅇ님'으로 통일하여 호칭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예를 들어, 신입 사원이 그룹 회장에게 '회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이제현 님'이라고 호칭을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위계가 있는 기업문화에 꽤 파격적인 제도였다. 직급이라는 벽에 부딪혀 자유로운 대화가 어려운 분위기를 없애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기업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이름에 '님'자 하나를 붙이는 작은 변화였지만 수직적 다단계 직급을 허무는 문화 차이는 컸다. 그 뒤로 CJ그룹의 시범적인 시도는 큰 호응을 얻어, '님' 호칭제를 실시하는 기업이 하나둘씩 늘어갔다. 영어는 호칭에서 높낮이를 부여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이름만 알면 Mr. 나 Ms. 를 이름 앞에 붙이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말로 대화를 하다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상황이 되면 대화를 하면서 마음이 훨씬 가볍고 내 생각을 표현하기 쉽다. 궁금한 점이 생겼을 때 상대에게 더 자유롭게 질문도 할 수 있다. 호칭이란 단지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이상의 문화가 담겨있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수많은 온라인 세계에서는 닉네임을 사용한다. 닉네임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나 나이, 직급 등 모든 개인 신상이 비공개인 상태에서 대화를 한다. 그러면 기본적인 대화 예절만 지키면 어떤 대화든 신속하게 이뤄진다. 닉네임을 사용하지 않는 공간에서는 상대의 이름에 'ㅇㅇㅇ님'으로 호칭하면 원만하게 대화가 흘러간다. 온라인 상에서는 닉네임을 이용함으로써 비교적 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어 우리말의 호칭에서 비롯되는 거리감을 상당히 극복되었다. 상대방을 제대로 불러주기 위한 위한 심리적인 탐색전 없이 기본 예의만 지킴으로써 자신의 목표나 상황에 곧장 집중할 수 있다.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모인 밴드나 단톡방에서도 신속한 의견 개진이 가능해진다. 말을 한 뒤에 혹시 내가 호칭을 잘못 부른 것은 아닌지 걱정하느라 대화를 망설이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 감정 낭비도 줄고 시간 효율은 올라갔다. 호칭을 '님'으로 호칭된다고 하여 내 삶의 권위가 낮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으려면 나만의 가치와 취미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보다 평등해지고 효율적인 닉네임 사용 문화는 앞으로도 확대될 것이다. 앞으로도 직위와 나이 프리미엄보다 공평하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가 더 확장되어 누구에게든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문화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