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타이타닉 10

바람인형

by injury time

그렇게 나의 보물 찾기는 십여 일 여 만의 달콤한 몽환으로 끝나버렸다. 아내는 장항에서의 십여 일의 가출에 대해서 내게 한 마디 추궁도 하지 않았다. 마이너스 천만 원은 아마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은 마이너스 천만 원이 들킬까 싶어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였다. 어떨 때는 차라리 바가지를 긁는 아내를 보는 것이 훨씬 났지 싶었다. 마이너스 천만 원이 아내에게 걸린다면 나는 다시 장항으로 쫓겨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마이너스 천만 원은 영원히 비밀로 묻힌 체 지나갔다. 그리고 집안에서 더 이상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아내의 일을 대신해서 시장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다시 예전에 조립하다만 패들 스팀보트를 하루 종일 만들고 있다. 이제는 오후에 외출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동네를 산책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처음 실직을 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꼴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책상 옆에 붙여있는 보물지도는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아내와 아들은 내 타이타닉을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시 다래끼가 도져서 눈꺼풀을 통통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일찍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다시 옷을 갈아입는다. 검정 실크 원피스다. 화장을 고치고 진주 목걸이와 귀걸이를 반짝이며 엉덩이를 실룩거리고 집안을 돌아다닌다. '보험왕'으로 아내가 뽑혔다며 오늘 밤 파티가 있다고 했다. 나는 아내가 대견스러워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가져가겠다고 했으나 아내는

"눈도 그래가지고 어딜 온다고 그래!"

며 핀잔을 준다. 아내가 나가는 것을 보며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원해진 사이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였다. 아내가 던져놓고 간 초대장에서 파티가 열리는 장소와 시간을 확인했다. 나는 아껴둔 양복을 꺼내 입었다. 그동안 살이 찌긴 했는지 양복 단추가 채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허리춤도 꽉 껴서 하는 수 없이 단추를 채우지 않고 허리띠로 살짝 벌어진 틈을 가려야 했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태를 보기도 하고, 옆태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고급 넥타이를 골라 매고 집을 나서는 데 눈에 매달려있는 다래끼가 문제였다. 하지만 아내가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나를 보면 이까짓 눈 다래끼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안개와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 가지고 아내가 있는 호텔 연회장로 향했다.


연회장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화려하게 드레스까지 뻗쳐 입고 파티라는 걸 하다니, 너무나 생소한 풍경이다. 아내는 그나마 수수한 축에 들었다. 상을 받는 여자들은 레이스가 잔뜩 달린 화려한 드레스를 질질 끌고, 짙은 화장을 한 얼굴로 무대에서 기념사진을 찍어댔다. 자신들만의 행사에 그들은 흠뻑 빠져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분주한 그곳에서 멀리 아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내는 홀짝거리며 와인을 마시고 서 있었다. 아내도 나를 보았다. 그러나 아내는 나를 보는 순간 안색이 변하며 슬쩍 자리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혹시 아내가 날 못 알아봤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내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황당한 일이 시작되었다. 아내 곁에 웬 남자가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 사내는 술을 마셨는지 약간 발그레한 얼굴로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내가 아내를 불러 세우자 아내는 당황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이 아내 옆에 서 있는 사내가 내가 말을 걸어왔다.

"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입니다."

놈은 내게 너무나 너그럽게 악수를 청했다. 아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가 스스로 상황을 수습하고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아, 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놈의 악수를 자연스럽게 거절하고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거울을 보니 다래끼로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누구한테 한대 얻어맞은 꼴이다. 내 꼴이 더욱 한심해 보였다. 꿀꿀한 기분을 좀 추스르고 화장실에서 막 나서고 있을 때였다. 이쯤이면 놈이 아내 옆에서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나는 보았다. 아내와 그 새끼가 화장실 옆 비상계단에 쑥덕거리고 있었던 것을. 내가 가까이 다가서려는데 그 새끼가 아내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내 눈앞에서 내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온몸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뜨거워졌다. 아내와 그 새끼도 나처럼 뜨거워 보이는 게 정말 기분이 엿 같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역함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와버렸다. 천만 원을 들고 장항으로 가서 뻘 짓을 하고 온 날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신장개업한 가게 앞에 서있는 바람 인형 같았다. 요란하기만 한 무용지물 바람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