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이 사랑에 빠지다. 막편
혼돈과 환란의 시간
by injury time Dec 25. 2024
# 이 글은 100% 허구로 지어진 단편소설임을 밝힙니다.
민식의 BMW는 히든과 가기로 했던 이대 정문 앞 히든 bar the 써클로 향했다.
매장 입구에 선 민식은 잠시 콧잔등의 식은땀을 닦아내고, 자꾸만 굽실거려 내려오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더 써클의 나무문을 힘차게 열었다. 그곳에 히든이 혹시나 와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게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히든은 역시 없었다.
얼굴이 알려지고 난 후 이렇게 혼자 술집이나 남의 영업집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 늦은 밤에 이 낯선 곳에 와있다니 민식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했다. 최대한 냉랭한 모습으로 민식은 매장을 가로질렀다.
- 어서 오세요~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 여자가 민식에게 인사를 한다. 생글 웃는 여자는 마치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살고 있는 딸 많이 낳은 엄마의 모습이다. 빛나는 흑단 같이 윤이 나는 똑 단발을 하고 달랑달랑 작디작은 진주알 귀걸이를 매달고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 가죽끈으로 이리저리 여밈을 하는 브라운톤 앞치마의 앞주머니에 두 손을 끼운 채 주인 여자가 민식 뒤를 천천히 쫓았다. 브라운 앞치마에는 다양한 펜던트가 장식되어 그녀의 발랄함과 닮아있었다.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 더 써클은 그날따라 손님이 한 명도 없다. 오래된 LP판으로 인테리어를 한 매장은 특별한 도장을 하지 않은 채 날 거 그대로의 거친 시멘트 처리된 회색빛 내지는 화이트톤의 오래된 창고 같은 느낌이었다. 곳곳에 유명가수의 미니어처와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민식은 신속하게 앉을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순간, 가장 큰 벽에 걸린 인상적인 팝아트가 민식의 눈에 띄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게 휘어진 노파가 지팡이를 짚고서 매장 안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서있는 듯한 팝아트 인물화다. 그림 속 인물은 마치 늙거나 청초한 모습이었다. 희끗희끗한 고수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닿아 있고, 창백할 정도로 얼굴이 환하고 판판하여 언듯 봐서는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젊은이 같기도 하고, 다시 찬찬히 보면 100살은 넘어 뵈는 할머니 같았다. 민식이 그 그림 앞에서 움찔하자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 제가 팝아트를 배워서 그렸어요. 붓 가는 대로 그리다 보니 어쩐지 어디서 본 얼굴이더라고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의 주인 여자 말에도 민식은 대꾸 없이 그 불편한 팝아트의 시선을 피해 무성한 이파리의 올리브나무를 지나 바깥 루프탑으로 나갔다. 올리브 나무에 매달린 상큼한 올리브 향기가 바람결에 민식의 코끝을 자극했다.
히든을 찾느라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서고, 오다가 만난 난생처음 본 여자에게 홀린 듯 미친 소리를 하고, 하필이면 그 여자가 그 옛날 영애의 모습을 하고 있고.... 민식은 머릿속이 불개미떼로 가득 차있는 듯 뜨겁고, 간지럽고, 복닥대서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반으로 잘라 머릿속의 불개미떼를 숟가락으로 박박 긁어 푹 떠서 버리고, 물로 샅샅이 씻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루프탑으로 나온 민식은 서둘러 입술에 필립모리스를 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 밤이 늦었습니다. 여기 사람도 없는데 담배, 담배 좀 피웁시다.
입술에 덜렁덜렁 담배를 붙이고 이곳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주인여자에게 입을 뗐다. 니코틴이 들어가자 조금은 평정심을 찾은 듯 그제야 루프탑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파라솔과 한없이 푹신하고 하얀 소파가 ㄱ자로 놓여있고, 빨주노초초초남보보보의 원색 격자무늬 패브릭이 휘장처럼 솔개바람을 가르고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마치 민식이 젊은 시절 영애와 함께 소원하던 세상, 딱 그런 곳이었다. 파라솔 밑에는 오렌지색 조명이 띄엄띄엄 쪼그리고 앉아 있어 깊은 밤이 더없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 보르도 와인, 그리고 뭐 가볍게 먹을 치즈 종류 주십쇼.
민식은 하얗고 푹신한 소파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서 그때서야 내내 민식을 쫒던 주인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는 배우 최민식을 한눈에 알아보는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라움으로 반달모양 눈을 떴다. 그때 알록달록한 패브릭 휘장이 흔들리며 구름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이 달빛에 드러났다. 여자는 귀가 얇고 단정했다. 양손을 아랫배에 올려놓고 정중한 자세로 민식 앞에 서있는 그녀는 달빛에 양볼이 발그레했다.
민식은 담배를 비벼 끄며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연예인을 처음 만난 시골 촌뜨기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보기 좋게 나이 들어 이제 막 불혹을 넘긴 안락한 모습의 여자였는데 분명 민식이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여자였다. 낯설지가 않았다. 하지만 민식은 끝내 그녀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주인 여자는 귀 뒤로 옆머리를 넘기며 주방 쪽 누군가에게 눈짓을 했다. 멀리서 와인잔을 닦고 있던 남자가 여인의 눈짓에 반응하며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둘은 부부 같았다. 서로 닮아 있었다. 앞치마도 똑같은 걸 매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 꼿꼿하고 바른 자세의 허리, 왁스 발라 꼼꼼히 머리카락을 정수리로 넘긴, 까칠한 수염하나 없이 잘 정돈되고 반듯해 보이는,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아 살면서 점점 아내와 닮아가는 주인 여자의 남편이었다. 눈동자를 가릴 정도로 속눈썹이 긴 남자는 금세 영화배우 최민식을 알아보고 가뜩이나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놀라움에 움츠렸다.
남자는 민식에게 두 손으로 악수를 청하고 정중하게 민식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주인 여자는 보조개를 보이며 남편에게 보르도 와인을 시켰다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게 뭐라고 그리 달달하게 속삭일 일인가. 그들 부부는 더없이 행복하고 넘치는 사랑으로 닮아가고 늙어가고 있어 보였다. 아마 그들을 닮은 사내아이도 두서너 명 있을 것이다.
민식은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당황해서 다시 한번 콧잔등을 쥐어짰다. 그리고 엉덩이를 들어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피곤이 몰려와 그들과의 대화를 급히 마무리하며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고 앉았다.
민식은 불과 한 시간 전쯤 신사역에서 본 젊은 시절 영애와 지금 또다시 마주하게 된 세상 안락하기만 한 주인 부부를 보니 온통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피곤해졌다. 그는 혼란한 머릿속의 기억과 인지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 집요하게 헤맸다. 그들의 세상이 진짜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연기만을 하며 살아온 배우 최민식, 자신의 세상이 진짜인지, 더 써클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것들이 모호해졌다.
늘 술과 담배에 취해 새벽에서야 잠이 들고, 꿈속에서는 내내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쫓기는 까칠하기 짝이 없던 민식은 그날밤 새벽까지 히든 bar the 써클에서 이 모든 기시감에 혼돈과 환란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최고의 가수 히든' 기사로 뒤집어졌다. 도산공원 근처 테헤란로에서 어느 청년이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로를 휘저으며 뛰어다녔던고, 마침 그 밤에 그곳을 운전하던 가수 히든의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둘 다 사망했다는 소식이 각종 포털과 sns에 퍼져 나가는 것을 민식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