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새로운 직장에 다닌다. 요즘 나는 불가마 찜질방에서 하루 6시간 야간 근무를 하고 있고, 가마를 뜨겁게 지필 때는 참나무보다 더 좋은 것들이 많다. 요즘 불가마에서 우드 머스크향이 난다며 손님들의 반응이 좋단다.
그레이프가 죽고 난 후 분주한 일처리가 꽤 다양하게 많았었다. 벽에 튄 황상미의 혈흔까지 완벽하게 사라진 어느 날 밤, 황상미의 시크릿 하우스에는 공교롭게도 여자의 흔적은 사라지고 어느 다른 가족이 새로 이사를 왔다.
나는 베란다 앞에 엎드려 종일 식빵을 굽는다. 내 몸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하얘지고 등두덩이는 어느새 갈색털이 자랐다. 경찰이 아파트 입구를 이 잡듯 뒤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린다. 이제 며칠 있으면 내 방에도 찾아올 것이다.
세상은 날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내 가슴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리한 칼날 하나가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구든 덤비면 팡! 하고 터질 일이었다. 뭐든 잘 참고 인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이런 젠장, 그건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 여자는 내 용기 없는 비겁함을 한 방에 알아본 걸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모든 삶이 느슨해지면 그것 또한 익숙해지리라 생각했었고, 관성적으로 나의 모든 삶이 (비록 그레이프는 죽고 없지만) 제자리로 돌아가길 바랐다는 마지막 변명을 남겨본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 여자도 나도 별거 없는 인간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그날 이후, 어느 날부터 모든 게 옅어지더니 점점 사라진 것 같다. 남은 건 이 방에 그 여자와 나의 오만한 체취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