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말 듣고 무대에 섰더니… 전설이 되었다

by yuri

무대 한복판에 섰다. 눈부신 조명이 나를 향해 쏟아졌고, 검은 복면 안에서 나는 관객석을 바라봤다. 박수 소리가 서서히 퍼졌지만, 그 안엔 뭔가 묘하게 어색한 공기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은 아직 이 무대에 누가 등장할지,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 몰랐다. 그저 사회자의 소개에 따라 자동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보다는 호기심, 흥분보다는 긴장. 공연장은 조용한 관찰자들의 시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차력단 따이따이! 어제 막 뉴욕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사회자의 과장된 멘트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그 옆에서 부장님은 나를 슬쩍 밀며 속삭였다.

“자, 얼른 나가야지.”

나는 복면 안에서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미 멘트는 나갔고 조명이 켜졌다. 나가야 한다.

일주일 전

축제 기획 회의에서 밴드부 공연을 위한 무대 세팅 시간이 문제로 떠올랐다. 댄스부가 화려하게 공연을 마친 뒤 악기 설치까지는 최소 15분의 공백이 생긴다는 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누군가 무대를 채워줘야 합니다.”

학생회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미 ‘복면가왕’ 준비 등으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 무대 세팅에 투입된 인원도 빠듯했다.

그때 다음 타깃으로 떠오른 건… 젊은 선생님들이었다.

“커튼 치고 무대 앞에서 잠깐 퍼포먼스 하면 되잖아. 차력쇼 어때요?”

부장님의 말은 지나치게 가벼웠지만 묘한 강압이 섞여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부장님의 반응은 흔들림이 없었다.

“업무 담당자가 그렇게 무책임해서야~ 이게 제일 덜 쪽팔리는 거야.”

그 순간, 부장님의 레이더에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윤보람 선생님이 포착됐다.

“보람쌤이랑 같이 하면 되겠네요. 나이도 비슷하고... 키차이도 설레고 좋아. 그림 나오는구만.”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부장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MZ들은 이런 거 시키면 가만히 안 있습니다.”

“보람쌤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야? 에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말이 아닌 건 아시잖아요…”

“보람쌤은 어때요? 라떼는 더한 것도 했다니까.”

그때 윤보람 선생님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가면 쓰고 하는 차력쇼면 나쁘진 않죠. 춤추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그 말을 하면 안 되죠…”

그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은 척했는지,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공연 준비의 시작

공연 준비는 빠르게 진행됐다. 복면을 쓰고, 허술한 막대기도 준비했고, 리허설까지 마쳤다. 나는 부장님께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장님... 이거 너무 허술한 거 같아요…”

그러자 부장님은 오히려 만족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핵심이지. 허술함 속에서 애들이 웃는 거야.”

그날, 윤보람 선생님은 내 복면 끈을 살짝 정리해주며 말했다.

“너무 조이면 말해요. 공연 중에 머리 아프면 곤란하니까요.”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복면 속에서 밀려왔다.

- 공연 당일 아침

당일 아침, 윤보람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오늘 공연 끝나고… 같이 저녁 먹을래요? 고생도 했고…”

나는 순간 멈칫했다.

“둘이서요?”

그는 피식 웃었다.

“부장님께 시간 되시면 같이 저녁 어떠냐고 여쭤봐주세요.”

어쩐지, 그 말의 온도가 모호하게 따뜻해서, 조금 더 헷갈렸다.

공연 직전, 복도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있었다.

“선생님, 윤 선생님이랑 많이 친하세요?”

“요즘 같이 다니시던데… 며칠 전엔 두 분이 커플티 같은 거 입고 계셨잖아요.”

차력단 복장을 말하는 건 알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커플티라니… 다음부터는 리허설 복장을 따로 챙겨야겠다. 교실 나갈 땐 시간도 좀 띄워야겠고...’

아이들의 추리력은 때때로 상상력을 넘어서 현실을 뒤흔든다. 그리고 나도, 그 무대 위에서 조금은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이따이단 나와주세요!”

우리는 복면을 쓴 채 무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아이들의 박수와 함께 섞인 낯선 시선이 꽂혔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고, 첫 퍼포먼스는 내가 맡았다.

무릎으로 막대기를 부수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얍!”

그 순간 관객석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거 가운데 잘라놓은 거잖아!”

“우리 학교에 키 작은 선생님은 한 분뿐인데…”

복면은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정체는 순식간에 탄로 났고, 어설픈 차력쇼는 점점 아이들의 웃음으로 이어졌다.

부장님이 복면 너머로 말했다.

“이럴 땐 뻔뻔함이 생명이야.”

가장 뻔뻔하게 무대를 이끈 사람은 부장님이었고, 가장 리듬을 잘 맞춘 사람은… 윤보람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터뜨렸고, 그 속에서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 사람이… 나와 함께 무대를 이끌었다는 그 사실이, 어쩌면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내려온 나는, 긴장을 풀고 가볍게 숨을 돌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정체를 눈치챈 듯, 새로운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따이따이쌤!”

“선생님, 따이따이따이~ 다시 해주세요!”

처음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복도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면,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든다.

“따이따이따이~”

그때, 윤보람 선생님이 다가왔다.

“다음 공연 아이디어 있는데요. 줄타기 어때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확신했다. 이 사람은... 그냥 퍼포먼스를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걸. 복면 뒤의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보람쌤이 작은 통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이건 선물이예요.”

“카카오 72%... 어? 제 자리에 있던 초콜릿, 혹시 선생님이었어요?”

“우리 검은색 복면 쓰잖아요. 검은색 하면 초콜릿이고… 그냥 그 분위기에 맞춰 드린 건데...”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 미안해요. 누가 내 자리에 초콜릿을 두었길래, 너무 궁금해서 계속 생각했거든요.”

윤보람 선생님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 누군진 몰라도 팬도 있고… 부럽네요, 선생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장난치면 다음 공연은 같이 안 할 거예요.”

“넵. 조용히 있겠습니다…”

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공연은 끝났지만, 어쩌면 그날 이후 교무실 안의 소소한 이야기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말: 글을 쓰다보니 추가하고 싶은 설정이 생겨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조금씩 다듬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앞부분 이야기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keyword
이전 07화나는야...프린(세)스 메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