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학교는 조용하면서도 따뜻했다. 하루 종일 들떠 있던 교정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교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은 교무실 책상 위를 부드럽게 감싸며, 마치 하루의 끝을 준비하듯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6월의 오후 5시는 아직도 밝고, 햇살은 금빛으로 교무실 안을 물들이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던 나는 오늘 하루를 되짚고 있었다. 축제의 열기 속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교사들의 분주한 발걸음, 그리고 교실 곳곳에 남은 색종이와 풍선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풍경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순간, 옆자리에서 조용히 퇴근 준비를 하던 태훈쌤에게 말을 건넸다.
“5시 교문 앞에서 보기로 했으니까, 이제 슬슬 가시죠.”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수업 교재들과 메모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위로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태훈쌤. 보람쌤 기다리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장난스럽게 재촉하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요. 다 했어요.”
그의 말투는 느긋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우리는 함께 교문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는 풋풋한 신규 선생님 3인방이 모여 있었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의 얼굴엔 설렘과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마치 첫 데이트를 앞둔 사람처럼 들떠 있었고, 서로의 옷차림을 은근히 확인하는 모습도 보였다.
“쌤들, 일찍 나오셨네요.”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희도 이제 막 나왔어요.”
“정우쌤도 같이 오고 싶었는데 오늘 일생일대 중요한 약속 이 있어서 안된다고 하네요. 대신 다음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아쉽네요...”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나저나 우리 뭐 먹을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회식 장소를 정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모두가 유쾌하게 의견을 나눴다.
“저희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선배님들이 드시고 싶은 거로 먹어요.”
“태훈쌤이랑 보람쌤은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저는 뭐든 잘 먹어서 상관 없어요.”
보람쌤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유쾌한 말투는 주변을 편하게 만들었고, 모두의 긴장을 풀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러면 1안, 파스타랑 피자. 2안, 쌀국수. 3안, 고기. 이 중에 뭐가 좋아요?”
우리는 투표를 통해 파스타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진 교문 앞, 첫 회식의 설렘이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는 점점 더 밝아졌다.
파스타집은 아늑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창가 자리에는 따사로운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우리 일행은 그곳에 앉아 메뉴를 고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지나쌤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런 거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태훈쌤이랑 같은 대학교 나오셨던데, 이 학교 오시기 전에 서로 알고 계셨어요?”
그 질문은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당황스러웠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교무부라서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혹시 제가 곤란한 질문을 했나요...?”
지나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했다.
“아니예요. 어차피 알게 될 건데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숨길 이유도 없었다.
“그러면 두 분 대학 때부터 아시던 사이였어요?”
“그렇죠....”
태훈쌤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엔 오래된 기억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두 분 언제 처음 만나신 거예요?”
“우리 과는 남자가 많고, 음악과는 여자가 많아서 커플로 하는 행사는 두 과가 조인을 했어요.”
그의 말에 지나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태훈쌤은 대학 때도 인기가 많았어요?”
그 질문에 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많았죠... 그래서 교생 나갔을 때 재미있는 일이 있었죠.”
태훈쌤은 말하지 말라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우리가 같은 학교로 교생을 나갔는데 거기에서 태훈쌤이 사생팬을 만났잖아요ㅋㅋㅋ”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태훈쌤은 고개를 떨구며 도리도리 흔들었다.
“궁금해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게.... 몇 반이었더라.... 좀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1학년 3반이요.”
태훈쌤이 알려줬다.
“맞다. 무튼 1학년 3반 교생으로 갔는데, 그 반에 태훈쌤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여학생이 있었어요.”
“와, 그때도 인기가 많았구나... 부럽다.”
“부럽지 않아요.”
태훈쌤이 인상을 쓰며 진지하게 말했다.
“무튼... 그 학생이 태훈쌤을 너무 좋아해서 완전 대놓고 드리댔죠.”
“한번은 그 학생이 꽃다발을 들고 와서 태훈쌤한테 사귀자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거절하면 되잖아요.”
“거절했죠.....”
태훈쌤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거절을 했죠. 타일러도 보고, 달래도 보고, 화도 냈는데... 애가 학교 여기저기에 저랑 사귄다고 소문을 내서.... 하....”
“난처했겠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래서 태훈쌤이 저를 판 거죠.... 제가 여자친구라고.”
“와~ 대박!!!”
“그래서요. 뒷 내용이 궁금해요”
“그래서 내가 그 학생한테 태훈쌤 여자친구라고 했더니... 결혼할 때까지는 모르는 거라고... 애가 진짜 당돌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아... 애가 그 뒤로 어디서 구했는지 내 사진 눈을 파서 빨간색 마카로 '저주할 거야'라고 적어놓았더라구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나는 무서운 척하며 양 팔을 비볐다.
“그래서 내가 미안해서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줬잖아.”
“그랬지ㅋㅋㅋ”
“그 뒤로는 어떻게 되셨어요?”
“그러고 보니까 교생 끝나고는 별 액션이 없었네...”
“사실... 교생 끝나고 그 학생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었죠...”
“어? 진짜? 왜 말 안 했어? 뭐라고 했는데?”
“그냥... 딸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계속 울면서 이야기하는데 한번만 만나줄 수 있냐고.” “와... 그건 좀....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당연히 안 된다고 했지.”
“잘했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태훈쌤 연락처는 어떻게 안 거예요?”
서정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애가 하도 졸라서 담임 선생님이 어쩔 수 없이 알려줬다고 하더라구...”
태훈쌤은 체념한 듯 말했다. 순간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건 좀 아니다.”
“맞아요. 개인정보를 그렇게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되죠...”
지나쌤과 유진쌤이 동시에 말했다.
태훈쌤은 말없이 물잔을 들었다. 그 표정은 평소처럼 느긋했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를 슬쩍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두 분만의 스토리가 있는 게 부러워요.”
지나쌤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두 분은 왜 학교에서 서로 모른 척하세요?”
유진쌤이 갑자기 궁금한 듯 물었다.
“아...”
태훈쌤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건... 직장에서는 모른척 하라고 해서”
그의 말에 내가 덧붙였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거죠. 학교는 원체 말이 많이 나오는 곳이다 보니...”
“두분은 사람친구 사이구나...”
서정쌤이 말했다.
그 순간, 보람쌤이 와인잔을 들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자자~ 여기서 더 깊은 이야기 나오면, 두 분만의 회식으로 바뀌겠어요. 지금부터는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주제로 전환합시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분위기 예능ㅋㅋㅋ”
“그럼요. 교사도 웃어야 오래 삽니다. 자, 질문! ‘요즘 가장 스트레스 받는 순간은?’”
지나쌤이 손을 들었다.
“저는... 아침 조회 시간에 애가 없어서 전화를 하는데, 애가 전화를 안 받을 때요. 그 순간 진짜 심장이 철렁해요.”
“와... 그건 진짜 공감돼요.”
“맞아요. 그럴 때는 온갖 상상이 다 되잖아요.”
유진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는 급식 메뉴가 별로일 때요. 하루의 낙이 사라져요.”
“태훈쌤은요?”
모두가 태훈쌤을 바라보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음... 회식 자리에서 과거 폭로당할 때요.”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보람쌤은요?”
보람쌤은 탄산수를 마시다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누가 누구랑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할 때요. 그럴 땐... 소외 당하는 기분이랄까... 농담이예요”
태훈쌤과 나는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유진쌤은 킥킥 웃었고, 지나쌤은 눈치를 챈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보람쌤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자, 다음 질문! ‘회식 끝나고 2차 갈 사람~?’”
분위기는 다시 활기차게 반전되었고, 모두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꺼냈다.
“자, 여러분. 오늘 드신 건 저희 부장님께서 쏘시는 거예요.”
“진짜요? 왜요?”
“축제 때 다들 너무 고생했다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회식비 지원해주셨어요. 따뜻하시죠?” “와... 부장님 최고!”
“감동이에요. 이런 학교 처음이에요.”
“선생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무사히 축제를 마칠 수 있었는걸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 그럼 2차 갈 사람?” 보람쌤이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어디로 갈까요? 카페? 아니면... 맥주 콜?”
“맥주요! 오늘은 분위기 너무 좋아요.”
우리는 그렇게 2차 장소를 정하며 다시 일어섰다. 파스타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서로의 웃음소리는 더 깊어졌다. 첫 회식의 설렘은 단순한 식사 자리를 넘어, 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따뜻한 장면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