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하다 교권을 잃었습니다

by yuri

선배 선생님들은 내게 종종 묻는다.

“요즘 애들은 정말 다르지 않아?”

“무슨 말 하는지도 모르겠던데. ”

“어떻게 그렇게 잘 어울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다 저만의 비결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취미였다. 누군가에게 말하기 부끄러웠고, 몰래 이어폰을 꽂고 만화책을 넘겨보며 좋아하던 캐릭터에 마음을 쏟았다. SNS 계정은 비공개였고, 팬아트에 좋아요를 누를 때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덕질은 내가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언어라는 걸.

그날도 그랬다. 평범한 날, 쉬는 시간, 아이들 책상 위에 놓인 만화책 한 권. 내 눈에 익숙한 표지가 들어왔다. 그리고 무심코 말해버렸다.

“어? 이건 고도센세네.”

정적. 그리고 폭발.

“헉, 선생님도 주술외전 봐요!?”

“그럼~ 너희랑 소통하려면 주술외전은 필수지.”

“결말까지 보셨어요?”

“봤지. 그 장면에서—”

“선생님, 제발! 스포하지 마요! 시험 끝나고 보려고 아껴뒀단 말이에요!”

“으흐흐... 돌아와요 고도센세...”

“으아아아 더 이상 하지 마요오오!!”

“싫은데ㅋㅋㅋ”

그 순간 느꼈다. 아, 나 방금 덕밍아웃했다.

덕후로서의 커밍아웃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 뒤로 아이들의 질문은 폭주했다.

“선생님, 다른 것도 보세요?”

“봤지. 귀결의 칼날. 3학년 교실에 있길래 한 권 집어 들고 정독했지. 다음 수업엔 OST 분석 할까 하는데...”

“진짜 덕후시네요.”

“이걸로 덕후라고 하기엔 아직 부족하지. 진짜 덕후는 남들이 모르는 작품에 진심이지. 나는 아직 덕후 반열에 오르려면 멀었어.”

“아닌데요, 냄새가 나는데요. 덕후의 향기.”

“덕후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 이후로 덕질은 장르를 넘나들었다.

애니메이션, 드라마, 아이돌, 게임까지 아이들과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하루는 아이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어떤 만화 장르 좋아하세요?”

“로맨스 코미디. 학원물이면 더 좋고.”

“헉... 저도 그 장르 좋아해요. 혹시 이거 아세요?”

아이가 말한 작품 제목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잠깐만, 이걸 네가 어떻게 알아? 솔직히 말해봐. 너 나랑 같은 세대지?”

“요즘 만화들은 깊이가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울림이 없달까...”

“흐음… 반갑다 친구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

그 순간, 아이와 나 사이에 이상한 동맹이 생겼다. 동년배 감성 동맹.

이후엔 아이돌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선생님은 어떤 아이돌 좋아하세요?”

“식스틴. 우열이가 곡을 잘 만들더라고. 오늘도 식스틴 노래 들으면서 학교 왔잖니.”

“에에, 선생님도 식스틴 팬이에요? 저도요! 제 핸드폰 배경화면도 식스틴이에요!”

그렇게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서 덕질을 했다. 캐릭터의 성장곡선을 논하고, 이상형 월드컵을 돌리며 열을 올렸다.

때때로 아이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이 캐릭터 좀 닮았어요.”

“어디가?”

“그 무심한 듯 챙겨주는 거요!”

솔직히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어른’이었는데, 오늘부터는 ‘덕후 친구’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 집중해서 보자. 중요한 영상이야.”

“… 선생님 이거 왜 봐요. 재미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요...”

“이거 교육과정 필수 영상이야.”

“선생님 꼰대 같아요.”

“…응. 나 꼰대 맞아. 그리고 우리 반이 제일 시끄러워.”

애들은 웃고,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날은 권위라는 단어가 낡아 보였다. 카리스마는 사라진 지 오래고, 나는 더 이상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선생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덕질의 세계에서 함께 울고 웃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덕후라고 솔직하게 말한 순간, 아이들은 마음을 열었다. 내가 무언가를 아는 어른이 아니라, 자신들의 언어를 말하는 어른이란 점에서 그들은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물론 가끔은 고민도 든다.

‘어떻게 해야 얘네가 날 좀 무서워할까?’

규칙도 지키게 하고, 교실 질서도 좀 잡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다. 무표정으로 지켜보자니 어색하고, 화를 내자니 마음이 불편하다. 결국 오늘도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애들이 무서워하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덕후의 세계로 또 한 발 들어선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작품을 찾고, 새 아이돌을 조사하고, 내일 쓸 수업 자료에 슬쩍 덕질 요소를 넣는다. 이건 단지 관심이 아니라, 절대 흑심이 아니다. 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하는거다. 그래 이건 공부다.

나는 덕후다. 이 시대의 소통 전문가. 그리고 오늘도 덕후 친구로 살아간다.

2년 뒤 졸업앨범 촬영일

그날은 마치 하나의 축제 같았다.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학교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평소엔 조금은 삐딱하고 시끄러운 아이들조차 말끔하게 교복을 다려 입고, 머리를 말끔히 정리한 채 왔고, 교실에는 각자의 ‘정체성’을 담은 소품들이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캐릭터 머리띠, 수트, 선글라스, 마법지팡이, 그리고 각종 굿즈들까지… 학교는 그날만큼은 하나의 거대한 콘셉트 무대였다.

아이들은 이미 며칠 전부터 흥분해 있었다. 졸업사진에 자신들의 덕질 세계를 담을 수 있다니—이건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정체성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코스프레를 할 생각이 없었다. 콘셉트 촬영? 다 좋다, 아이들이 즐겁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까지 코스프레를 하라는 분위기가 슬슬 커져가고 있었다.

“선생님, 같이 해요!”

“덕후인 선생님이 안하는건 너무 슬프지 않아요?”

“선생님이 빠지면 세계관 완성 안 돼요!!”

처음엔 웃으며 넘겼다.

“나는 그냥 촬영 도우미 할게~ 너희들이 주인공이잖아.”

하지만 아이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급기야 투표를 했다.

‘우리 반 세계관에 선생님 캐릭터 넣기 찬성 vs 반대.’

당연히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결국 교무실에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거, 나도 해야겠구나.”

처음에는 대충 넘길 생각이었다. 가장 단순한 머리띠 하나, 망토 하나 정도.

‘이거 입고 하루만 버티자.’

하지만 이상하게, 소품을 고르는 순간부터 마음속 어딘가가 반응했다.

“이건 우리 반 세계관과 더 잘 어울리겠는데?”

“이 컬러는 3반이랑 겹치니까 이걸로 하자”

“캐릭터 설정… 음... 선생이니까 역시 고도센세?”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의상에 세세한 패턴을 추가하고 있었고, 그걸 본 다른 선생님이 말했다.

“생각보다 되게… 진심이네요?”

내가 코스프레에 진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촬영 날, 아이들은 환호했다.

“선생님 진짜 하셨네요! 대박!”

“선생님 없었으면 우리 세계관이 무너질 뻔했어요!”

그렇게 나는 아이들 한가운데 앉아 사진을 찍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올리며 포즈를 취했다.

그 순간, 아이들은 웃고 환호했지만, 내 마음 속은 이상하게도 뭉클했다.

‘아… 내가 지금 이 아이들과 같은 세계 안에 있구나.’

촬영이 끝나고 교실 정리가 한창일 때, 한 아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선생님,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순간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속엔 묘한 울림이 남았다.

코스프레라는 건 단순히 옷을 입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아이들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처음엔 얼떨결에 떠밀리듯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진심이 되어 있었다. 컨셉을 고민하고, 소품을 고르고, 아이들 틈에서 포즈를 맞춰가며 웃던 그 모든 순간들이 이제는 선명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다시 생각했다. 진심이라는 건, 처음엔 억지로 시작되었더라도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일 출근은 좀 망설여진다. 명대사를 남발하던 내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고, 그걸 본 다른 선생님들의 표정이 자꾸 떠오른다.

내일은 그냥... 조용히 책상에 앉아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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