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장소는 학교 근처의 조용한 펍이었다.
축제의 여운과 첫 회식의 설렘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모두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여기 학부모님 계실 수도 있으니까 지금부터는 ‘선생님’ 말고 ‘대리님’, ‘과장님’이라고 부르기로 해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요? 갑자기 직장놀이예요?” 보람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저번에 국어쌤이 점심시간에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을 했는데, 학교로 민원 전화가 왔다네요. 근무지 이탈이라고...”
“헐... 진짜요?”
“응. 외출이나 조퇴 신청하고 나갔냐고 꼬치꼬치 캐물으셨다더라고요. 그 일 이후로 교직원 회의에서 점심시간 산책도 외출 신청하라고 했잖아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전 왜 그렇게까지 하시나 했는데... 이해는 되지만, 우리도 사람인데 잠깐 나갔다 오는 것도 안 되나 싶었어요.”
유진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직급 정리할게요. 저는 과장, 태훈쌤은 대리, 보람쌤도 대리, 신규쌤들은 사원.” 내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태훈쌤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이거 갑질 아니에요?”
“싫으면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셨어야죠.”
“좋아요!”
태훈쌤을 제외한 모두가 장난스럽게 동의했다.
“근데 과장님, 질문 있습니다.”
서정쌤이 손을 들며 말했다.
“뭔데요, 사원님?” “우리 학교는 왜 축제를 1학기에 하는 건가요?”
“아, 그건 2학기에 체육대회가 있어서 그래요. 두 행사를 한번에 치룰 수는 없으니까...”
“보통 회사는 축제만 하거나 체육대회만 하지 않나요?”
“그건 사장님의 경영 철학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사고를 안 친다는...”
“아... 사고 방지용...
”직원들은 죽어나고...”
태훈쌤이 조용히 말했다.
“아주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나는 정답이라는 듯 밝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맥주랑 안주 시킬까요? 전 생맥 500.”
“저도요.”
“그럼 생맥 500 여섯 잔, 안주는 감자튀김이랑 치킨. 우선 이렇게 시작하죠.”
“좋아요!”
잔들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주문이 들어가자 분위기는 한층 더 밝아졌다. 그때 보람쌤이 다시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잔을 들었다.
“과장님, 대리님. 질문 있습니다.”
“뭔데요?”
내가 웃으며 받아주자, 그는 능청스럽게 말했다.
“과장님은... 저랑 김대리님 중에 누구랑 제일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에 순간 테이블 위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웃으면서도, 은근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맥주잔을 들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음... 둘 다 친하죠. 윤대리님은 분위기 메이커고, 김대리님은... 오래 봐서 편하고.”
“그건 너무 외교적인 답변이잖아요.” 보람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때 갑자기 지나쌤이 난입했다.
“두 대리님은 과장님과 얼마나 친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말에 태훈쌤은 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오래 봤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니까요.”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어딘가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보람쌤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요... 과장님이랑 친해지고 싶은데, 뭔가 벽이 있는 느낌이에요.”
“벽이요?”
“네. 과장님은 늘 웃고 계시지만, 그 웃음 뒤에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음... 그럴 수 있죠. 종종 들어요.”
내가 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다.
“학교 다닐 때도 친구들이 저랑 처음에는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보이지 않는 저만의 선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이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느낌이 든다고...”
말을 마치고 나니, 순간 공기가 조금 조용해졌다. 나는 웃으려 했지만, 그 웃음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태훈쌤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그의 눈빛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담담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처럼. 그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나답게 있을 수 있도록 조용히 거리를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때 보람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근데요, 과장님. 그 선... 넘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조심히 건너오면 되는 거예요?”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대리님과 저는... 우리가 그 정도로 친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더 친해지고 나서 생각해볼게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엔 분명한 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선은 벽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열린 문처럼 느껴졌다.
태훈쌤은 말없이 잔을 들었다. 그의 눈빛은 조용했지만, 어딘가 담담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겪었던 외로움과 상처. 사람들에게 선을 긋는 이유가 단순한 거리감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마음을 열기 위한 방어라는 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조심스러운 시선과 느릿한 움직임은 내 마음을 함부로 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보람쌤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럼 오늘은 친해지는 첫 단계라는 걸로~”
“그 정도는 괜찮네요.”
나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잔들이 다시 부딪혔고, 맥주잔 너머로 서로의 마음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밤, 우리는 선 너머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지나쌤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선배님들... 저 진짜 고민 있어요.”
눈은 살짝 풀려 있었고, 말투는 평소보다 느려졌다.
“저... 남자친구랑... 헤어져야 할까요?”
유진쌤이 바로 반응했다.
“헐, 왜? 너네 1년 넘게 사겼잖아.”
“1년 넘었지... 콩깍지가 벗겨지려고 그런가,.. 마음에 안 드는 것만 보여.”
지나쌤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얘가요... 취직할 생각을 안 해요. 맨날 ‘인생은 한방’이라면서 주식이랑 코인만 해요. 놀이동산 알바랑 카페 알바... 뭔가 열심히 하는 것 같긴 한데... 그걸로는 미래가 안 보이잖아요.”
지나쌤은 말끝을 흐리며 맥주잔을 다시 들었다. 잔이 입술에 닿기 전, 태훈쌤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생활비는 어떻게 해요?”
“부모님이 일부 지원해 주세요. 근데 저한테도 자꾸 투자하라고 하고... 저는 그런 거 무서워서 못 하겠거든요.”
나는 지나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나씨, 그 사람 좋아하는 건 맞죠?”
“좋아하죠... 근데 이제 나이를 먹어가니까 현실적인 문제들이 고민이 돼요. 그래서 자꾸 ‘취업 준비는 안 해?’ ‘계획은 있어?’ 이런 말만 하게 되고... 걔는 그게 잔소리처럼 느껴져서 화내고... 그게 너무 싫어요.”
보람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나씨도 나이든 어린이 되는거죠. 연애는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지속되려면 현실이 필요하니까요.”
지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근데 얘는 진짜... 자기가 비트코인으로 대박 날 거라고 믿어요. 저는 그냥... 안정적인 걸 원하거든요. 월급 받고, 계획 세우고, 같이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사람.”
“그쵸... 아무래도 꿈이 밥 먹여주는 건 아니니까.”
태훈쌤이 담담하게 말했다.
“선배님들… 저 너무 현실적인 거예요?”
지나가 물었을 때,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지나씨가 먼저 철든거지”
“헐, 저 철든 거예요? 싫은데...” 지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고,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엔 지나쌤의 귀여운 철듦도, 우리의 공감도, 그리고 조금은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도 섞여 있었다.
잠시 후, 지나가 조용히 말했다.
“근데… 아직은 못 헤어지겠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그게 다 사라지면, 그때는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우리는 아무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겪었기에,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고 있었기에.
맥주잔이 다시 부딪혔다. 이번엔 조금 더 조용하게, 조금 더 깊은 여운을 남기며.
그 밤, 우리는 지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의 사랑을 돌아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지나온 길이었고, 누군가는 아직 걷고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지나쌤은, 그 길의 한복판에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