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직후, 커피 한 모금으로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던 찰나였다. 흐릿한 졸음이 뒤엉킨 교무실의 공기 속에서, 나는 생활기록부에 펜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란에 펜 끝이 허공을 맴돌다 그대로 멈췄다.
“지금 교무실에 연예인 와 있어요!”
“어디? 어디?”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미화 선생님에게서 나왔다. 말수가 적고 평소엔 조용하던 분인데, 그 표정은 소녀처럼 들떠 있었다. 반짝이는 눈과 높아진 목소리, 주변의 선생님들까지도 호기심에 귀를 기울였다.
“누가 왔다는 거예요?”
“이지안! 영화 <넘버 1>의 주인공 있잖아요! 천만 관객 넘긴 그 배우요! 수련쌤이 예전 담임이었는데, 연예인이 되면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대요. 오늘, 그 약속 지키러 온 거래요!”
이지안. 순간,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퇴근길에 조용히 들른 영화관. 팝콘을 하나하나 씹으며 바라본 그 영화. 스크린 속 그 배우의 눈빛과 감정, 대사 하나하나가 삶을 그대로 옮겨 담고 있었다.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저 배우도 학교를 다녔겠지. 그 시절 담임은 누구였을까. 혹시 인터뷰에서 이름이 나왔을까?’
그 생각은 곧 묘한 감정으로 연결됐다. 부러움. 내가 만든 이야기도 누군가의 삶에 남을 수 있을까. 내가 만난 학생 중 누군가는 훗날 세상에 나아가며 “제가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건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말로 꺼내진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 가능성에 조용히 싹이 텄다.
‘그 배우랑 친하다고 하면 아이들 눈빛이 달라지겠지?’
그 순간, 나는 상상했다.
“너희들, 이지안 알지? 선생님 제자야. 오늘 수업 잘 들으면 영상통화 시켜줄게.”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반응은 빠르고 솔직했다. 설렘을 감추지 못한 얼굴....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프린(세)스 메이커.
이 단어가 내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 내가 키운 아이가 세상에 나아가, 내 이름을 주는 그 순간을 상상했다. 인터뷰 중 “선생님 덕분입니다”라는 한 마디. 조용하지만 선명한 존재의 증명.
그날부터 나는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플랜 1: 될성부른 떡잎 키우기]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아이는 은별이었다. 조용한 성격에 교실에서 존재감은 흐릿했지만, 양궁 실력 하나는 눈부셨다. 전국 소년체전 금메달. 그 정도면 국가대표도 꿈은 아니었다.
‘금메달 따고 방송에서 “중학교 담임 덕분이에요.” 그 한 마디만 들으면 난 만족해.’
나는 생활기록부를 정성껏 작성했고, 대회 일정도 직접 챙겼다. 담임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응원과 지원. 아이는 묵묵히 활을 당겼고, 나는 그 그림자 뒤에서 마음을 보탰다.
6년 뒤, 은별이는 올림픽에 출전해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 장면은 TV로도 뉴스로도 쏟아졌다. 나는 조용히 화면 앞에 앉아 있었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어릴 적부터 저를 지지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짧은 한 줄. 하지만… 내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잊은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그 아이 삶의 배경이었을 뿐이었다.
그날, 나는 알게 되었다. 너무 일찍부터 공을 들였다는 것을...
[플랜 2: 될성부른 나무 키우기]
두 번째는 현우였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고요한 눈빛 속엔 단단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 눈빛이 처음으로 반짝인 건, 어느 날 아이가 “길에서 연예기획사 명함을 받았어요”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때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길거리 캐스팅이라니—순간, 나는 속으로 외쳤다. ‘너다. 내가 찾던 프린스.’
부모님과 여러 차례 상담을 나누었고, 진지하고 긴 대화 끝에 아이의 꿈을 밀어주기로 했다. 그날부터 나는 현우의 일상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노래 실력은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연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학교에서 진행한 역할극 시간, 반장 역할을 맡은 현우는 누구보다 진심을 담아 연기했다. 표정은 생기 있었고, 대사도 또렷했다.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교과서를 낭독하는 듯한 단조로움이 퍼졌다. 말은 또렷했지만, 울림은 없었다. 가슴을 통과하지 못한 감정은 결국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안가 부모님께서 상담을 요청했다.
“선생님, 저희는 현우가 학업에 좀 더 집중했으면 해요.”
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담담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분명 잘 자랄 것이다. 비록 연예인은 아니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꼭 빛날 수 있는 아이다.
하지만, 내가 기다렸던 순간— 인터뷰 속 ‘그 한 마디’는 현우에게서 오지는 않을 것이다.
[플랜 3: 잘 큰 나무 키우기]
세 번째는 지수였다. 이미 기사 수십 개가 검색되는 콘솔 게임 리그의 유명 선수. 그 아이가 우리 반으로 전학을 오다니...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번엔… 진짜다.’
이번엔 내가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 이미 프린스가 된 아이가 내 반에 왔으니까...
하지만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지수가 전학오고 얼마있지 않아 어머님께서 면담을 요청했다.
“선생님, 이번 대회 출전 때문에 그러는데 출석인정결석 처리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스폰서 대회인데 중요한 무대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어머님 죄송하지만...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대회는 출석인정 처리가 어렵습니다.”
어머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출석 인정이 안 된다고요? 우리 아이 연봉이 얼마인지 아세요? 인터뷰에 학교 이름 나가면 학교 홍보에 도움되고 좋을텐데요... 왜 안 된다는 거죠? 예외라는 게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형평성에 어긋나서요...”
며칠 뒤, 지수는 전학을 갔다.
이번 플랜도 실패였다. 나는 나지막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너무 힘들다… 시달린다.”
반 배정표가 나오는 날이면, 깊은 숨을 들이쉰다. 교무실에서 아이들 명단을 받아든 순간, 나는 또다시 희망을 품는다.
“이번엔… 있을지도 몰라.”
작은 가능성 하나에 설레고, 조용한 기대에 눈이 반짝인다. 아무도 모르게, 내가 찾는 단 하나의 아이를 상상한다.
그리고 언젠가 뉴스 속 누군가가 인터뷰를 하며 단 한 마디만 꺼내준다면—
“저를 만들어준 건… 선생님입니다.”
그날이 오면, 나는 조용히 웃을 것이다. 자랑하지도, 과장하지도 않고. 속으로만 아주 살짝, 나 자신에게 속삭일 것이다.
“나는야… 프린(세)스 메이커였다.”
에필로그 - 이름 없는 나무 아래서
가끔은 그렇게, 아주 평범한 하루에도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교무실 창밖으로 노을이 퍼질 때면, 책상 위의 생활기록부를 쓰다 말고 문득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게 된다.
어떤 아이는 체육관에서 활을 당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아이는 회색빛 촬영장에서 대사를 외우고 있거나, 게임 속 세계에서 손끝으로 승리를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들을 기억한다. 누구는 나를 기억하고, 누구는 지나쳤겠지만— 그 이름 하나하나, 내 마음에는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교사라는 이름은 자주 잊히고, 언급되지 않고, 조용히 배경으로 남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건넸던 응원, 믿음, 작은 격려들이 어디선가 그들의 뿌리가 되어주었을 거라는 걸.
어느 날 문득, 어떤 뉴스 속에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그 아이가 인터뷰에서 말한다면—
“그때,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는데 한 사람이 믿어줬어요. 그 사람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 말에 내 이름은 없더라도, 나는 웃을 수 있다. 아마도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일 테니까.
나는 지금도 아이들 사이를 걷고 있다. 이름 없는 나무가 되어, 그들의 길을 묵묵히 지키며. 언젠가 단 한 마디가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오늘도 조용히 꿈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