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이라는 환상, 그리고 12년의 인내라는 훈장

by yuri

검정고시 감독관 자리에 서서 시험지를 훑어내려가다 보니, 문득 등 뒤가 서늘해졌다. 4지 선다형의 단조로운 문제들, 한눈에 봐도 오답인 선택지들. 공부를 좀 한다는 학생들에게 이 시험지는 아마 달콤한 '도피처'처럼 보였을 것이다.


매년 한두 명씩 나를 찾아와 "선생님, 저 자퇴하고 검정고시 봐서 내신 세탁하면 안 될까요?"라고 묻던 아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과고나 외고처럼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학교일수록 이 고민은 처절하다. 전국에서 모여든 수재들 사이에서 0.1점을 다투며 내신 등급 하나에 일희일비하느니, 차라리 학교를 떠나 검정고시로 내신을 만회하겠다는 계산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며 졸업장을 따는 게 정석 아니겠니"라며 교과서적인 답변을 돌려주곤 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검정고시의 난이도는, 아이들이 왜 그토록 학교 밖으로 탈출하고 싶어 하는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피 말리는 전쟁터 같은 교실에서 버티느니, 검정고시로 손쉽게 만점을 받고 남은 시간에 수능에 올인하는 전략. 어쩌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가장 합리적인 '가성비'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변해버린 게임의 법칙: 지름길은 있는가?

답답한 마음에 진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이 정도 난이도면 학교에서 고생하는 애들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요. 과고, 외고에서 내신 안 나와서 우는 애들은 뭐가 됩니까?"

내 말을 듣던 선생님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떼셨다.

"그래서 예전엔 나도 2등급 안으로 들어오는 애들이 자퇴한다고 하면 안 말렸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예전' 이야기야."

이 이야기의 방점은 '예전'에 찍혀 있다. 지금의 입시 판도는 그때와 다르다. 야금야금 수시 비중이 높아지더니, 이제 상위권 대학은 거의 80% 이상을 수시로 뽑겠단다. 학생부 없는 검정고시생에게 수시로 좋은 대학을 가는 문턱은 에베레스트만큼 높다. 게다가 이제는 정시조차 학교생활기록부를 반영하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내신 점수 몇 점에 집중한 나머지 '생기부'라는 거대한 기회를 통째로 버리는 것,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위험한 도박에 가깝다.


학교는 '지식'이 아닌 '사회'를 배우는 곳

검정고시 감독 중 수험생들의 인적사항을 살피며 눈에 띄었던 건, 앳된 얼굴의 아이들이었다. 중학교 1, 2학년 정도 나이의 아이들이 고졸 검정고시를 치르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월반'이자 '초고속 트랙'이다. 하지만 나는 그 영특해 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감탄 대신 안타까움을 느꼈다.

학교는 단순히 학문을 연마하는 도장이 아니다. 그곳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과도 한 공간에 머무는 법을 배우고, 급식 줄을 서며 양보를 익히고, 동아리 활동을 하며 갈등을 봉합하는 법을 배우는 '작은 사회'다.

학문적으로는 1~2년 앞서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타인과 어우러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영재(?)는, 결국 거대한 사회라는 파도 앞에서 쉽게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 아이들을 보면 존경심마저 든다. 그들은 지식만을 배운 게 아니라, '단체 생활'이라는 거친 파도를 견뎌낸 인내의 훈장을 단 셈이기 때문이다.


조금 늦으면 어떤가, 내 페이스대로 가면 그만이지

지름길이 보이면 누구나 흔들린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지름길은 그만큼의 공백과 리스크를 동반한다. 지금 당장 10대 시절에는 1년의 차이가 인생 전체를 결정지을 것 같은 거대한 격차로 느껴지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다.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1년은 아주 찰나의 순간일 뿐이라는 것을.

조금 늦으면 어떤가. 정석대로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고 해서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도착했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은 결과의 중요성을 뜻하지만, 나는 그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이 우리 삶을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지금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희는 지금 가장 가치 있는 정공법을 택하고 있는 거야. 그 12년의 고생이 언젠가 너를 지켜주는 단단한 뿌리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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