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포티면 어때요,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by yuri

음악실 창밖, 흐드러졌던 분홍빛 벚꽃이 진 자리에 어느새 연둣빛 새잎이 돋아났다. 해마다 채도를 높여가는 저 초록의 생명력을 보고 있으면, 교탁에 선 나의 채도는 어쩐지 조금씩 낮아지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은 이제 꽃잎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 잎사귀 하나에도 비명을 지르며 사진기를 들이대고, '팔로우 승인'이라는 사소한 사건 하나에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까르르 웃는다.

"선생님, 저 누구한테 팔로우 신청했는데 안 받아줘요. 혹시 제가 싫은 걸까요? 고민하다 겨우 말 건 건데..."

죽을상으로 말하던 아이가 몇 분 뒤 "드디어 수락됐어요!" 하며 해맑게 뛰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 명도 높은 웃음소리 사이에서 문득 자문해 본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저렇게 사소한 일에 설레어 보았던가.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내 안에 저장된 '웃음의 총량'을 야금야금 '화(火)의 에너지'로 맞바꾸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가설이 머릿속을 스친다.


아는 것이 병이 되는 순간들

젊은 날의 나는 '모르는 게 약'인 시절을 살았다. 업무 프로세스를 몰랐기에 저자세로 묻는 것이 당연했고, 학부모의 항의 전화에도 그저 송구한 마음으로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의 나는 비어있었기에 유연했고, 몰랐기에 겸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력이 차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내 안에 견고한 '매뉴얼'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을 처리하는 정석을 알고 효율적인 동선을 꿰고 있다 보니, 타인의 서툰 방식이 눈에 가시처럼 박히기 시작한다.

"굳이 이렇게 할 필요 없잖아요. 제가 이 일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짜증은 상대가 아니라 사실 나 자신을 향한 채찍질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방식'과 '눈앞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깊어질수록, 예전엔 허허 웃으며 넘겼을 일들이 이제는 분노의 기폭제가 된다. 아는 게 많아질수록 세상은 답답한 것투성이고, 보이지 않던 허점들은 현미경을 들이댄 듯 선명해진다.

교무실에서 들려오는 날 선 목소리들—배려가 없다는 항의, 절차에 대한 불만—은 결국 우리 모두가 각자의 '정답'을 지키기 위해 내뱉는 비명들이다. 우리는 유능해질수록 웃음을 잃고, 노련해질수록 화를 얻는다. 아이들이 SNS 팔로우 하나에 일희일비할 때, 어른인 우리는 결재 서류의 오타 하나, 업무 연락의 무례한 말투 하나에 온종일 기분을 망치며 내 마음의 평화를 깎아먹고 산다.


영포티, 정답을 허무는 유쾌한 노력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정말 웃음을 화로 치환하는 과정이라면 참 억울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억울함을 달래주는 유쾌한 풍경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얼마 전 교무 회의 시간, 교감 선생님께서 수줍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선생님들께 잘 보이려고 오늘 카고 바지 입고 왔어요." 회의실을 나가며 "주책맞게 왜 그런 말을 했나 몰라"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 모습을 보는데, 문득 '귀여우시다'는 생각과 함께 '영포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며칠 뒤, 뙤약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배회하던 고3 아이들에게 음악실 그늘을 내어주었을 때다. 한 녀석이 "저 정신연령이 낮아서 후배들이랑 잘 놀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자, 옆에 있던 친구가 핀잔을 준다. "너 영포티라는 말 듣고 싶냐?"

어느새 '영포티'라는 말이 나이 들어 젊은 척하려는 이들을 비꼬는 단어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나를 따르라"라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젊은 감각을 배우고 그들의 세계로 뛰어드는 노력이 훨씬 근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늘도 우리 반 아이들과 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웹툰과 웹소설 이야기를 나누고, 서툰 연애 상담에 진심을 다한다. 아이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그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 애쓰는 나 또한 누군가의 눈에는 '영포티'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나이를 먹으며 얻은 '아는 체'와 '짜증'을 내려놓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꺼이 이 젊은 소란함 속에 머물고 싶다.


다시, 옴마니 반메훔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쩌면, 웃음을 잃고 화를 얻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아는 정답'을 조금씩 허물어 타인의 웃음소리가 들어올 빈자리를 만드는 일이 아닐까.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읊조리는 "옴마니 반메훔"이 내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는 주문이라면, 아이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수다는 내 안의 굳은살을 말랑하게 만드는 마법이다. 내 안의 연꽃이 진흙탕 같은 감정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잃어버린 웃음의 할당량 중 단 1%라도 화 대신 다정함으로 채워본다.

나의 나이 먹음이 굳어버린 정지화면이 아니라,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섞여 매일 조금씩 변주되는 근사한 음악이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혀 본다.

옴마니 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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